이제는 기독교인들이 답할 때: 영화 '기생충' 감상문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20-03-17 21:53
조회
169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답할 때: 영화 '기생충' 감상문

 

연극적 감수성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작품상 소식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이가 들면서 국뽕 끼가 심해졌나, 아니면 ‘작품상’이라는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무엇보다도 “기생충”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의 적확(的確)함과 치밀한 표현력에 감동을 받았던 터였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함이 주는 아름다움을 오랜 만에 느껴 본다.

“기생충”에 대한 찬사는 들을 만큼 들었을 테니 이 정도에서 접기로 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고 싶다. ‘봉테일’이라는 별명답게 수상소감들도 모두 완벽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다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상소감 어디에서도 그 영화의 주제인 경제적 불평등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는 우리 체제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대가로, 바로 그 체제의 정점,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 올랐다.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계속 반지하에 남고, 봉감독님은 ‘박사장’의 위치에 올라 대중의 ‘리스펙’을 받게 되었다.

수상 이후 여러 논평들을 들어보아도 현실 변화를 위한 진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감독의 천재성과 노력, 배우와 스텝들의 열정, 한국영화 101년 역사의 영광,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 총선에서의 유불리 등이 입담의 주제이다. 영화가 제기한 문제의식과는 동떨어진 내용들이고, 심지어 이 평론들은 영화가 비꼬는 기존질서의 가치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들이다. 감독은 스크린에서 우리 사회 문제를 폭로하고, 관객은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영화관에서 이를 소비하며, 이를 통하여 영화 ‘산업’은 융성해 진다. (감독이나 배우가 아닌 제작사와 배급사 대표가 작품상 수상소감을 말한 것은 상징적이다.) 흥미로운 분석 한 가지, 미국 주도의 영화제에서 아시아인이 상을 휩쓴 것은 트럼프로 상징되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할리우드의 최소한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항은 딱 거기까지다.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연극적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허구 세계의 대상에게는 애정과 동정심을 가지지만 막상 현실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한 심리를 일컫는 말이다. 예컨대 연극을 보면서 주인공의 불운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는 귀부인이 자신의 마부는 추위에 떨든 말든 바깥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감수성이다.

거대한 속임수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우리 시대의 핵심문제에 대한 영화 외의 다른 노력들도 운명은 엇비슷하다. 2014년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영문판은 50만 권이 팔렸다 하고 우리말도 수만 권은 족히 팔렸을 텐데, 완독률이 가장 낮다는 평판답게 (나를 포함하여) 끝까지 읽은 사람은 많지 않은 듯싶다. 한 학자가 세계 문제에 대한 획기적인 이론과 해결책을 내놓으면, 수십 명의 명망 있는 학자들이 달려들어 각자 자기 입장에서 분석하고 칭찬하고 비교하고 비평하다가, 너덜너덜해져 폐기되는 것이 학계의 관행이다.

토마 피케티를 필두로 우리 시대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몇 권의 책들이 번역 출간되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노동부 장관으로서 상위 1% 부자의 탐욕을 다룬 『로버트 라이시의 자본주의를 구하라』(2016년)나, 중산층 붕괴를 분석한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퍼트넘이 쓴 『우리 아이들』(2017년), 자본주의의 불합리와 모순을 지적한 슬라보예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중상층의 위선을 고발한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2019년) 등이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보수적 매체들에서도 이 저서들을 앞 다투어 소개한다. 아마도 이 책들을 읽을 정도의 지식인들이라면, 이 책들이 제시하는 해법을 행동으로 옮길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리라.

책은 사람을 계몽시키는데, 계몽시키려면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객관적으로 사태를 보는 사람은 무모하게 뛰어들지 않는다. 책은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 해결책을 실행할 동력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책을 쓰는 사람도 이를 읽는 사람도 이 사실을 잘 안다. 거대한 속임수다! 너무 심하게 말했다면 용서하시라. 좀 더 온건하게 표현하자면, 행동할 능력과 의지가 없는 사람이 책을 쓰고 읽는다.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대답해야 할 때

마르크스주의는 그 이론의 허망함과 실천의 폭력성 때문에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된 지 오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는 다음과 같은 명언은 우리의 가슴에 오래 남아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해석과 변화, 이론과 실천, 설교와 삶, 교리와 선교는 뗄 수 없이 한 데 얽혀 있는 것이다. 이론을 정립하면 실천의 방식이 도출된다는 생각은 근대주의(모더니즘)의 착각일 뿐, 성경의 사고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실현된 적도 없다.

성경의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걷다가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맹인을 만났다. 제자들이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요9:2) 여기서 잠깐, 제자들의 질문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불평등에 관한 깊은 고민에서 나온 것인지 몰라도, 맹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폭력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맹인도 엄연히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인데,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장애에 대하여, 그의 죄에 대하여, 그의 부모의 죄에 대하여 논하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고통 받는 사람에게 종교적 죄책감까지 얹어주었다.

영화 “기생충”의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인 ‘냄새’ 문제를 생각해 보자. 냄새에 관한 씬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였다. ‘이 감독 참 날카롭네. 마치 문제를 핀셋으로 콕 집어 올리는 것 같구먼. 그런데 좀 얄밉네. 냄새 나는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언젠가 설교 중 내가 경험한 외국인들의 냄새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설교 후 아무도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미국에 살 때 김치냄새, 마늘냄새로 위축되었던 경험을 상기하면서, ‘아차!’ 하는 자책감으로 지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봉감독은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이제 냄새는 ‘구별 짓기’(부르디외)의 한 기준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영구히 각인되어 버렸다.

다시 요한복음의 맹인 이야기로 돌아가자. 예수님은 이 맹인이 들었을 것을 두려워하였는지 급하게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요9:3) 예수님은 죄와 질병의 관계에 대한 대답을 한 아름 가지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나 죄와 질병의 이론을 설명하기에 앞서 예수님은 이 맹인에 대한 긍휼한 마음을 가지셨다. 제자들은 그를 쓸모없는 잉여인간으로 대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실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았다.

이게 기독교다. “기생충”은 질문을 던짐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고,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이 대답해야 할 차례다. 피케티, 라이시, 퍼트넘, 지젝, 리브스는 진단과 처방을 내렸고, 이제 기독교인들이 실천해야 할 차례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그 대답을 몸으로 보여주셨고, 교회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나는 우리 시대의 근본적 문제인 경제적 불평등을 고칠 동력을 제공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 현재 한국의 교회가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위하여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식으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접근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재 한국교회가, 신뢰도가 바닥을 치고 있으며 제 몸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는 한국교회가, 도대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것인가?

 

()을 넘는 사람

계층 간 문제를 폭로하는 영화나 저항과 반란을 다룬 영화들은 무수히 많지만, “기생충”이 특별한 이유는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한다는 데 있다. 영화 “기생충”의 대사 가운데 계급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있다. “선을 넘는 사람을,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라는 이선균의 대사다. 한국인에게 ‘선’(線)은 매우 특별한 은유다. 선에는 세로줄과 가로줄이 있다. 세로줄은 위로 올라가기 위하여 잡아야 할 줄이다. ‘강라인’ 이냐 ‘유라인’이냐에 따라 운명이 갈리고, 내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위하여 “선을 대어야” 한다. 어느 조직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연줄’ 혹은 ‘비선’(秘線)이 있기 마련이고, 모르고 썩은 동아줄 잡았다가는 끝없이 추락한다.

가로줄은 나나 내가 속한 집단과 타인을(주로 낮은 사람들) 구분하는 선이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기준으로 차별과 배제가 이루어진다. 이 선은 들어갈 문을 찾을 수 없는 ‘성’(城, 카프카)이고, 하루아침에 길러질 수 없는 취향인 ‘아비투스’(부르디외)다. 지하 6피트 지상 30피트의 철제 장벽(트럼프)도, ‘1인치의 장벽’(봉준호)도, 아무나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들이다.

우리 사회의 전통적 가로줄은 출신지역, 학력, 성별 등이었는데,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김혜수의 “나 이대 나온 여자야”는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말이 아니다. 같은 대학이라도 어느 캠퍼스냐를 따지며, 웃돈 주고서라도 서울 강남의 번호판을 달려 한다. 새로운 풍속도도 있다. 산후조리원 동기, 대치동 과외, 서울대 실험실, 로펌 인턴, 편법 증여 등을 통한 노골적인 ‘꿈 사재기’(dream hoarding,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도 있고, 골프회원권, 에스테틱 회원권, 리미티드 에디션 등의 은근한 문화적 선긋기도 있다. 아 참, 소망교회, 사랑의교회 교인이라는 교회 인맥도 무시 못 할 요소다.

‘선긋기’는 사회적 불평등이 사람의 마음에 새긴 마음의 습관이기도 하고, 불평등을 고착시키고 사회적 분노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문제부터 풀어나가야 한다. 나는 기독교 복음에 이 문제를 풀 유일한 답이 있다고 믿는다.

 

선 긋기의 달인, 기독교?

과연 현재 한국의 교회가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을까? 지난 번 나의 글을 읽은 사람들 중 믿음이 좋은 분들은 ‘아멘, 역시 기독교가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줄 거야.’ 라면서 머리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좀 사려가 깊은 분들은 ‘그게 도대체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오늘날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고사하고 해악이나 끼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좋겠다.’ 면서 코웃음을 치셨을 것이다. 교회야말로 앞에서 말하였던 대중문화계나 학계보다 훨씬 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은가? 해방 후 한국교회는 산업화의 척후병으로서 자본주의라는 형질을 획득하였는데, 도대체 기독교가 어떻게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한단 말인가? 신앙의 이름으로 포장된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카톡의 닫힌회로 안에서 정보를 유통하는데 누가 그 견고한 순환의 굴레를 깨뜨릴 수 있는가? 한국교회야말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배제와 차별을 일삼는 선 긋기의 달인이 아니던가?

그러나 나에게는 한 가지 믿음이 있다. 한국교회가 너무 멀리 나가서 그런 것이지 원래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믿음이다. 나는 한국교회 대부분의 문제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것이며, 따라서 해답을 얻으려면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은 편견과 선이해를 버리고 성경을 읽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빌립보 시()의 점치는 노비

성경의 한 장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귀신에 사로잡힌 노비를 고쳐 주는 사도행전 16장을 들여다보자. 2천 년 전 로마의 속주 빌립보에 신 내림 받아 점을 잘 치는 용한 무녀가 있었다. 그 신분은 노예였는데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였다. 여기 ‘주인들’이 복수형인 것에 주목하라. 한 주인이 여러 노예를 거느리는 것은 늘 있는 일이지만, 한 노예에게 주인이 여럿인 경우는 드물다. 아마도 돈이 급하였던 원래의 주인이 이 노예의 지분을 나누어 팔았나 보다.

이 무녀는 바울이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아보고,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다.” 여러 날 동안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내가 만일 바울이었다면 어땠을까? ‘와우, 정말 귀신같군. 어떻게 날 알아보고.... 이 도시에서 제일 용한 무당이 전도를 대신 다해 주니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되겠네. 이제 곧 빌립보 시에 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겠군.’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바울은 “심히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이 부분이 이해가 안 된다. 나 같으면 은근히 즐겼을 텐데, 바울은 왜 심히 괴로워하였을까? 만일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즉시 떠오르지 않는다면, 여러분도 이미 많이 타락한 것이다. 바울은 이 노비를 불쌍히 여겼다! 몸은 주인들에게 끌려 다니고 영혼은 귀신에 속해 있다. 주인들에게는 재산 가치가 있고, 바울에게는 명성을 높여줄 수 있는 존재였지만, 바울은 이 노비를 수단이 아닌 존엄한 인격으로 보았다.

시대마다, 지역과 사회마다 차별의 대상이 다르다. 바울이 살던 시대의 대표적 차별 3가지를 들라면, 민족과 인종이 다른 데서 오는 갈등, 사회적 신분의 차이, 여성 차별 등이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을 말하면서,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갈3:28)라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노비는 세 가지 차별의 목록에서 모두 최하위에 자리 잡은 소수파 중의 소수파였다. 이방인-여자-노예, 게다가 귀신까지 들렸다. 만일 바울이 이 여인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다면 그는 세상의 모든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는 성공하였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바울이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긴 것은, 값싼 동정심이나, 메마른 정의감, 혹은 율법적 의무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사고와 의지력과 감정과 가치관과 노력 등 전 존재를 동반한 행위였다. 한 마디로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전2:16; 빌2:5) 바울에게는 부유한 무역상이나 귀신들린 노비나 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주의 백성이었다. 그에게는 복음 전도의 대성취보다 이름 없는 노예의 영혼이 소중하였다. 아니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 그러다가 감옥에 갇히는 것이 곧 복음의 성취라 믿었다.

어떻게 바울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어렸을 적부터 들었던 토라의 가르침이 몸에 밴 것일까? 그리스·로마 시대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영향을 받았을까? 아니다. 모든 것의 시작점은 자기에 대한 발견이다. 그리스도의 빛을 본 후 그는 자신의 실상을 알았다. 자신이 비참한 죄인임을 철저하게 깨달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맛보았다. 자신이 그동안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것들, 다른 사람과 선을 그었던 것들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깨달았다. 유대인의 혈통도, 종교적 완전함도, 로마의 시민권도, 다소에서 배운 헬라의 학문도, 모두 토사물처럼 역겨운 것들뿐이었다. 자기의 것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해소는 바로 이런 깨달음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낮은 마음으로 함께 고통을 나누는 중 자연스럽게 재물도 나눈다. 그런데 나의 재물을 주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높낮이가 생기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 사이의 사랑의 교제를 가로막는 선(線)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제도적 평등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내가 직접 형제에게 재물을 건네는 것보다 내가 국가에 세금을 내고 형제가 국가로부터 일자리와 기본적인 소득을 받아 나와 동등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을 선호한다. 사랑은 평등의 기반 위에서만 싹 트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이 말하는 경제정의의 핵심, 즉 희년(禧年)의 정신이다.

 

경제적 불평등 해결을 위한 기독교의 자산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기독교의 자산을 요약해 보자. 첫째, 내가 은혜 받은 죄인임을 아는 것, 둘째, 사람들 사이에 어떤 자랑도 차별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셋째, 진정한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정의와 평등의 사회를 꿈꾸는 것. 진보적 지식인이나 인권운동가들은 세 번째 대의에 헌신한 사람들이고, 인류애로 가득 찬 도덕가들은 두 번째를 강조한다. 그러나 첫 번째 깨달음이 없이는 둘째와 셋째의 대의는 무너지기 쉽다. ‘강남 좌파’가 위선적이라고 비판받는 것이나 (나는 이 비판이 반드시 공평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성공한 진보적 정치가들이 어느 순간 청산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유는,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가르치려 드는 오만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바로 첫 번째의 진리, 가장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나는 기독교 가르침의 위대성이 첫 번째에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그 앞에서 늘 겸비하게 애통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웃에게 큰 이익을 끼치거나 위대한 정치적 업적을 이루어도 자신의 이름이 남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같은 죄인인데 내가 더 많이 가진 것 같아 미안한 마음뿐이다. 가난한 사람은 게을러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자신이 정말 복음을 알고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 가장 위대한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이 믿음 위에 인권과 정의와 평등이 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한국기독교는 첫 번째 진리에 대하여서는 알고 있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 자신들이 이룬 성취를 자랑하고, 사회적 약자를 무시하고 타자(他者)를 거부하며, 정의와 평등, 평화와 통일에 대한 전망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의 진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아무리 잘 해도 첫째의 진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 사회에 진정한 소망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둘째와 셋째로 나아가지 못하면 첫째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주장마저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올인하여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이 문제다. 상대를 규탄하는 고함소리에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이 묻혀버리고 만다. 어쩌면 자신의 죄와 약함을 부러 잊기 위하여 더 크게 고함을 치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기생충”이 제기한 물음에 기독교가 답할 수 있다고 말한 이유를 이해하시겠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기독교로 돌아가야 한다. 광장에 나와서 외치기 전에 골방에 들어가 자신을 살피자.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되 그들과 나 사이에 선을 긋지 말자. 다른 사람들이 나의 경계를 침범할 때,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경계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는 환대해야 한다. 나도 언제든지 선 밖으로 밀려날 수 있음을 알고, 선 밖으로 밀려 났을 때 이를 담담히 받아들인다. 모든 선과 경계와 장벽과 국경이 무력화되는 종말의 때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