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신에게": 신을 갈망하는 현대인을 위하여_ 행17:16-31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10-14 19:03
조회
168
“알지 못하는 신(神)에게”: 신을 갈망하는 현대인을 위하여
행17:16-31

“이름 없는 아버지께”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서 있었던 일이다.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3살배기 아들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던 젊은 아빠가 있었다. 아내의 뱃속에 둘째를 가지고 있는데 만삭이다. 아빠가 식량을 구하기 위하여 바깥에 나갔다가 공습으로 부상을 당하여 집에 가지 못하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빠가 오지 않자 만삭의 아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남편을 쉽게 만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엄마는 몇 달 후 둘째아이를 낳다가 죽고, 4살이 된 아들과 갓 태어난 둘째만 세상에 남겨졌다. 두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목숨을 부지하였다.
아이들은 아빠 없이 자라난 것은 물론 아빠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 얼굴도 목소리도 생각이 안 난다. 엄마가 남긴 아빠의 유물은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밖에 없다. 엄마가 그렇게 당부하고 죽었건만 아빠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큰아들은 아빠가 자기를 업고 놀아줄 때 아빠의 등이 넓고 따뜻했었다는 느낌만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다.
다 자란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자신들을 찾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전쟁 통에 돌아가신 것이 분명하다. 자기들만 고아로 남겨 놓고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이니 사람의 도리는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정성껏 제사상을 차렸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제사를 지내려면 신주(神主)를 모시거나 지방(紙榜)이라도 써서 붙여야 하는데, 아버지의 성도 이름도 모르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긴 해야겠는데 아버지의 이름을 모른다. 이들은 의논 끝에 이렇게 지방을 썼다. “이름 없는 아버지께” (To the Unnamed Father) 아버지가 계신 것은 분명한데, 아버지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니, 이렇게 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알지 못하는 신(神)에게”
이름을 알 수 없는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 것과 비슷한 난감한 상황이 성경에 나온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의 한 제단 앞에는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알지 못하는 신(神)에게.” (To the Unknown God) 어떻게 해서 이런 이름의 제단이 생기게 되었을까? 아테네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다. 제우스, 헤라, 아폴론, 아테나 등 올림퍼스 산의 12신이 있었고, 또 그보다 저급한 신들 수백, 수천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태양과 달과 산과 계곡과 바다와 바람과, 동물과 새와 곤충과 파충류와, 전쟁과 지성과 음악과 술 등,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신성을 부여하였다. 주변의 모든 사물에 신성을 부여하고서도 혹시 빠트린 것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제물을 얻어먹지 못한 신이 노해서 해코지를 하면 어떻게 하나 염려하다가 이런 제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말은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전쟁 때 잃어버린 아빠를 찾는 두 아들이 품었던 마음과 비슷하다. 이들은 분명히 아버지가 존재하는데 그게 누군지 몰라서 “이름 없는 아버지께”라는 지방을 써 놓고 제사 드렸다. 아테네 사람들은 분명히 신(神)이 존재하는 것은 알겠는데, 그 신이 어떤 신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 신에게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침 아테네를 방문한 바울은 온 시내에 가득한 신전과 제단을 보고, 또한 특히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쳐진 제단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 “아테네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17:22) ‘종교심’(religiosity)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정의하면 “신을 두려워하여 공경하려는 마음”이다. 신이 존재하며, 온 천하를 만들었고, 인류를 다스리고, 사람을 심판할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해 주고, 날마다 힘을 주어 살아갈 수 있게 하며, 사람들에게 사랑을 심어주어 서로 사랑하도록 한 궁극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종교심은 아테네 사람들 마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세계 어느 역사박물관에 가도 신상(神象)과 제구(祭具)와 샤먼과 비의(秘儀)가 없는 곳이 없다. 과거 미개한 사람들만 종교심이 강했던 것은 아니다. 과학시대에도 역술인의 숫자는 늘어만 간다. 우리나라에 역술인이 무려 50만 명이란다. 목사의 숫자가 20만에 육박하여 너무 많다고 생각하였는데, 좀 더 분발해야 할 것 같다. 초현대식 스마트 빌딩을 지어놓고서도 돼지 콧구멍에 오만 원짜리 두 장 꽂아놓고 고사를 지낸 후에야 들어간다.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은 조상의 묘부터 이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심은 이렇게 풍부한데, 섬겨야 할 대상을 모른다. 하나님의 이름도, 성품도, 어떻게 그에게 다가가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아테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이름의 제단을 만든 것은, 인류의 이러한 문제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상징이다. 종교심이 강한 아테네 사람들이 과연 신을 찾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알지 못하는 신을 찾는 두 가지 방법: 우상숭배와 불가지론
한국전쟁 때 아버지 잃어버린 아들들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아들들은 아버지를 몹시 그리고 있었지만, 아빠의 이름도, 생김새도, 성품도 모른다. 큰아들이 가지고 있는 희미한 기억과 오래되어 빛이 바랜 옛 흑백사진 한 장 뿐이다. 이것 가지고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아버지를 그리워한다는 점에서는 이 두 아들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둘이 달랐다.
큰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이런저런 상상력을 키워나가는 방법으로 아버지를 그리워하였다. 사진을 토대로 하여 아버지의 현재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키는 얼마 정도일 것이고,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 것이고, 좋아하는 음식은 어떤 것이고, 성격은 어떨 것이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셨을 것이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아버지가 다 갖고 있으려니 생각하며, 온갖 상상력을 동원한다.
둘째는 좀 더 똑똑한 친구이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를 상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상상 속의 아버지를 만들어놓고 그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좋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둘째는 그저 아버지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그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니, 아버지에 대하여 말하지 말자고 한다. 둘째의 생각이 더 맞는 것 같다. 형도 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는 것일 뿐이다.

꼭 같은 일이 아테네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첫 번째 큰아들과 같은 시도가 ‘우상숭배’(idolatry)이고 좀 더 똑똑한 둘째의 생각이 ‘불가지론’(agnosticism)이다. 좀 더 유식한 신학자들은 첫째의 방식을 ‘긍정의 길’(라틴어로 via positiva)이라 부르고, 둘째의 방식을 ‘부정의 길’(라틴어로 vis negativa)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긍정의 길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말하면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하고 고상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이다. 부정의 길은 ‘사랑’이라는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묘사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상숭배는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신은 태양처럼 생겼을 거야, 해가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잖아?
아냐, 달도 중요하고 밤도 중요해. 중요한 일은 밤에 이루어지는 법이거든.
신은 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존재일거야.
네가 바다에 안 나가봐서 그렇지 바다가 얼마나 변화무쌍하다고.
무슨 소리? 힘이 센 걸로 치면 번개를 당하지 못할 걸?
인간에게 지혜를 주는 신이 가장 중요하지. 호모사피엔스라고 하지 않는가?
아름다운 음악과 미술을 주관하는 미(美)의 신이 더 근원적일 것 같은데...
나는 술이 제일 좋더라. 한 잔 마시고 춤추다 보면 모든 근심이 사라지지.
그런데 신은 남성일까 여성일까? 역시 힘센 남성이겠지?
힘만 세다고 다냐? 아기는 여자가 낳잖아?

둘째아들 같은 사람들도 있었으니 바로 아테네의 철학자들이다. 신에 대하여 이렇게 우상을 만들어놓고 경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한 마디로 신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불가지론자들이다.
신에 대하여 뭘 안다고 그래? 아는 것이 없으면 이야기하지 말자. 신은 사람의 상상을 뛰어 넘는 분이야. 우리가 상상하는 것이 신이라면 이미 신이 아니지! 신이 있더라도 인간처럼 감정에 휘둘려서 자기에게 제물을 바치면 좋아 하고, 바치지 않으면 해코지하는 건 아니야. 그러니 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저 다른 사람 해치지 않고 자연의 순리 따라 조용히 사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신에 대하여 말하지 말고, 네 안을 들여다보라. 정념에 휘둘리지 말고 쾌락에 빠지지 말고 평온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네. 죽음이 두렵다고? 자연의 일부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이런 두 가지의 방향은 아테네 사람들만 가지고 있었던 신을 찾는 방법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 신으로 섬긴다. 1961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던 흐루시초프(Nikita Krushchev)는 말했다. “동무들이여, 공산주의는 신성합니다.” 후계자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도 말했다. “레닌의 생애나 활동, 그 이름과 관계된 모든 것은 신성하다.” 소련 전역에 수천 개의 레닌 동상이 세워졌고,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레닌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전시하였다. 신을 폐위시킨 사람들은 성소를 비워둘 수 없었다. 이와 꼭 같은 일이 중국에서 또한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신의 대체물은 많다. 이영애나 고현정 같은 아름다운 여배우를 ‘여신’이라 부르고, ‘아이돌’ BTS는 글자 그대로 아이돌이고, 유명 연예인은 갓호동, 유느님으로 높여 부른다. 스포츠 스타들도 신의 반열에 들어서 있다.

불교의 경우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작은아들과 같은 똑똑한 사람도 있다. 종교 가운데 현대인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종교는 바로 불교이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한국의 불교는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 원효대사나 지눌과 같은 위대한 고승들이 있었고, 최근 들어서도 숭산스님이나 성철스님과 같은 승려들은 서양에서도 존경을 받고 있다.
성철스님(1912-1993)은 24세에 입산 출가하여 해인사에서 득도하였다. 8년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방바닥에 등을 대지 않고 꼿꼿이 참선의 자세로 앉아서 수행하는 것) 수행을 하였고, 옷 한 벌로 40년을 산 살아 있는 부처라고 한다. 그가 임종 시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과 같은 임종게(臨終偈)이다.
生平欺狂男女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이고 호렸으니)
彌天罪業過須彌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넘는구나.)
活陷阿鼻恨萬端 (산채로 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라.)
一輪吐紅掛碧山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 걸렸네.)

이 시에 대하여 찬반양론이 많지만, 나는 이 시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성철이 나름의 도(道)를 깨닫고 많은 말로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그게 정말 진리일지 모르겠다는 고백이다. 불가지론이다!

불교에 성철과 같은 고승들이 있는 반면, 대다수의 불교 신자와 승려들은 우상숭배에 머물고 있다. 저마다 제가 좋아하는 신을 만들어 제 편할 대로 섬기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절에 가든지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이 있고, 그 주변에 다른 전각들이 있다. 관음전(觀音殿)은 중생을 도와주는 여자 보살인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관음보살은 흰 옷을 입고 얼굴이 11개이고, 손이 천 개라서 많은 사람의 기도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옆으로 돌아가면 삼신각(三神閣) 혹은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도교의 북두칠성을 일컫는 칠성, 토속신의 산신, 복을 주관하는 독성(獨聖)을 모시는 전각이다. 뒤편의 명부전(冥府殿)에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새긴 패들이 놓여 있는데, 승려가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면 지옥의 심판을 면하고 극락왕생한다고 한다.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하는 탑을 돌면서 기도하는 탑돌이, 기와에 수험생의 이름이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새기고 기도하는 기와불사 등은 전형적인 우상숭배이다. 불교는 고승들의 불가지론과 일반 중생의 우상숭배가 기이한 형태로 공존하는 종교이다.
자기 멋대로 신(神)을 만들어 섬기는 우상숭배와 신에 대하여 알 수 없다고 하는 불가지론, 혹은 이 둘의 불편한 공존. 이 진퇴양난에서 벗어나 진정한 신을 찾을 수 있을까?

계시(啓示):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심
한국전쟁 때 아버지를 잃은 아들들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가 정말로 어떤 분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까? 1983년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KBS 방송사가 주관하는 “이산가족 찾기”를 통하여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낡은 사진 한 장이 단초가 되었다. 아버지는 전쟁 통에도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 자식들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만날 수 없었는데, 이제 찾게 되었다. 이전에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 상상 속에서만 그리던 아버지를 만났다. 이전에 아버지가 존재하기는 해도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는데 이제 구체적인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성격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큰아들처럼 자기 생각대로 아버지를 상상할 필요도, 둘째처럼 아버지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사도바울도 하나님에 관하여 아테네 사람들 앞에서 그와 꼭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17:23)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행17:27하-28상)

바울은 그분에 대하여 똑바로 가르쳐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사실 그는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다. 아테네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셨고 바울이 그를 만났다. 예수님은 최후의 계시이요 계시의 완성이다.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이제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우상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고 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신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면 안 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친히 만나 주셨다.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
예수님은 모든 계시의 완성이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고하는 그림자와 같은 계시이고, 신약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기록한 책이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계시에 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다시 글로 쓰여 진 계시이다.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많고 논란의 소지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욕망에 따라 제멋대로 하나님을 상상하는 ‘우상숭배’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고 하는 ‘불가지론’에 빠진다. 한쪽에서는 신상(마리아상)과 전각(예배당)과 샤먼(목사)과 태극기+십자가와 배(腹)와 돈과 욕망과 전통과 신학을 섬기고, 다른 쪽에서는 신비주의적 명상을 통하여 미지의 신적인 세계로 들어가려 한다.
예수님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부럽고 늦게 한국 땅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억울하다. 베드로가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1:8상)라고 말할 때, 살짝 밉기까지 하다.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당신의 형상을 보여주시면 좋으련만. 그러면 나도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줄 알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다. 그는 예수님에 관하여 기록한 성경을 깨닫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분명히 보게 하신다. 오늘도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성경 속에 있는 진정한 하나님을 찾기 위하여 성경 속으로 들어가자. 우리의 죄악이 눈을 가려서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게 하니, 나의 욕망과 더러움을 제하고 눈을 밝혀 잘라고 간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