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_ 행7:44-50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09-11 11:58
조회
282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
행7:44-50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이 두 번 나온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7:48상)
However, the Most High does not live in houses made by human hands.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17:24)
The God who made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is the Lord of heaven and earth and does not live in temples built by human hands.

두 구절은 각각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행한 긴 설교의 일부이고, 두 번째 구절은 사도바울이 아테네 거리에 가득한 신상과 신전들을 보고 아테네 광장에서 외친 말이다. 두 번째는 쉽게 이해할만하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는 우리가 어렸을 적 재미있게 읽었던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의 발상지이다. 열정의 사람 바울은 그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자 거룩한 분노가 일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신들은 사람이 만든 것들이요 그 안에 생명이 없으니, 그 미련한 짓을 그만두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을 주제로 한 바울의 유명한 아레오바고 설교에 대하여서는 다른 장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문제는 첫 번째 구절이다. 스데반이 ‘손으로 지은 곳(들)’이라고 부른 곳, 즉 이방 도시 아테네의 우상과 같은 미련함과 악함이 가득한 곳은 어디인가? 바로 예루살렘 성전(聖殿)이다! 스데반은 복수형을 사용함으로 성전을 이방신전과 같은 지위로 전락시킨다. 스데반의 주장은 성전을 종교와 삶의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던 당시 유대인들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성전: 하나님의 발등상을 봉안(奉安)할 집
당시 유대인뿐 아니라 구약성경을 아는 사람들은 스데반의 이 담대한 주장에 대하여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과연 성전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스데반은 단지 타락한 성전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자체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말씀하는 성전의 기원과 영광을 아는 사람은 스데반의 이 말에 충격을 받을 법하다.
성전의 기원은 스데반으로부터 약 1,000년 전, 위대한 왕 다윗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와 이스라엘과의 언약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가나안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요인이었던 것을 잘 알았다. 왕 되기 이전에도 언약궤를 모신 성막(聖幕)을 찾았고, 왕이 된 후에는 언약궤를 그의 궁으로 모셔 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언약궤를 위한 집, 즉 성전을 짓기로 결심하였다. 성전에 대한 다윗의 이해를 잘 보여주는 다음 구절을 보자.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가로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등상을 봉안(奉安, 평안히 쉬게 함)할 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대상28:2, 개역)

그는 언약궤를 ‘하나님의 발등상’(footstool)이라고 이해하였다.(참고. 시99:5; 132:7; 렘애2;1) 하나님께서 하늘을 보좌로 삼으시고 땅에 발을 딛고 앉아 계시는데, 그 발을 얹을 상(床)이 바로 언약궤라는 것이다. 그 언약궤가 편히 쉴 수 있는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구히 자신의 왕국의 중심에 있다는 의미이다. 다윗의 진심을 아신 하나님은 대대로 그의 왕위를 견고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그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아가 날 것을 약속하셨다. 다윗이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 자신이 일생에 걸쳐서 모은 모든 재산을 성전을 짓는 비용으로 헌금하였다.
예루살렘에 성전의 부지는 다윗이 천사를 만난 타작마당을 사서 바친 곳이었고,(대상22:1) 먼 옛날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한 유서 깊은 산이었다.(대하3:1) 성전의 양식은 하나님의 영이 다윗의 마음에 보여준 설계도에 따른 것이었다.(대상28:12) 즉 지상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 성전을 모방한 것이다. 솔로몬은 그 설계도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축하였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축복하신다는 의미로 그의 영광의 상징인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였다.(왕상8:10-11)
이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세워 성전을 관리하게 하였고, 매일 제사와 분향이 드려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소한 일 년에 세 차례 성전을 순례하며 하나님을 섬기고 축제를 즐겼다. 모든 간절한 기도가 여기서 드려졌고, 최상의 예물이 봉헌되었고, 모든 아름다운 시와 노래가 성전을 위하여 바쳐졌다.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전을 세운 사람들은 저주를 면하지 못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후에는 성전이 더욱 추앙을 받았다. 바벨론 포로들은 성전이 무너진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성전을 그리워하였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성전이 있는 편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민족의 죄악을 회개하면서 “주의 얼굴빛을 황폐한 성소에 비추어 달라고” 기도하였다.(단9:17) 70년 만에 해방이 선포되었을 때, 수많은 백성들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에 힘썼다. 하나님은 제2성전도 축복하셨고,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처음 영광보다 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학2:9)
이게 구약의 성전이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은 적도 있지만, 그것은 성전 자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우상의 전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성전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사를 가진 성전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스데반은 무슨 의미로 성전을 우상의 전당과 동일시하였을까? 성전의 또 하나의 측면을 보도록 하자.

성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
성전의 구조는 다른 종교의 신전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점이 있다. 넓은 뜰 한 가운데 성전이 있는데, 외소(外所)와 내소(內所)로 구분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여러 신전이나 왕궁과 별반 차이가 없다. 넓은 뜰을 지나야 하고 또 외전(外殿)을 거쳐야, 비로소 왕이 살고 있는 가장 깊은 내전(內殿)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이다. 내소 안에는 ‘언약궤’라고 부르는 것이 놓여 있다. 언약궤는 길이 약 150cm, 너비와 높이가 75cm 정도 되는 장방형의 궤이다. 나무로 만들었고 금을 입혔으며, ‘속죄소’ 혹은 ‘시은좌’(施恩座, Mercy Seat)라고 불리는 뚜껑을 덮었다. 그 궤 안에는 언약의 두 돌판이 들어 있고, 궤 위 양 옆모서리에는 두 천사가 주조(鑄造)되어 있다.
이 언약궤의 모양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라. 성전 내실에 의자처럼 생긴 황금상자가 놓여 있고 그 양 옆에는 천사들이 날개를 드리우고 서 있다.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빠지지 않았는가? 신상(神像)이 없다! 다른 신전 같으면 황금상자의 위, 두 천사의 사이에 신상이 앉아 있어야 한다. 왕궁이라면 왕의 보좌 위, 문관과 무관이 도열한 사이에 왕이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전의 그곳은 텅 비어 있다. 이것이 바로 구약 이스라엘 종교,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기독교의 특징이다. 언약궤는 신의 형상이 아니라, 신을 지시해 주는 상징일 뿐이다. 온 천하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드신 그분, 사람에게 물질과 창조력과 기술을 주신 그분을 형상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우상숭배이다.
언약궤를 모신 성전도 이와 같은 언약궤의 특징을 정확히 반영해야 한다. 성전 안의 언약궤가 우상이 될 수 없을진대, 성전이 우상이 될 수는 더욱 없을 것이다.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왕상8:13)라고 하였지만, 주께서는 그곳에 계실 정도로 작은 분도 아니고, 더더욱 영원히 계시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하였을 때도 하나님은 알 듯 모를 듯한 말씀을 하셨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삼하7:5-7)

이 구절에서 두 가지 대조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집’과 ‘장막’의 대조이고, 다른 하나는 ‘산다’는 동사와 ‘다니다’는 동사의 대조이다. 특히 ‘다니다’는 동사는 동작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형태가 사용되었다. ‘돌아다니다’(move around)가 더 나은 번역이다. 하나님은 집(성전)에 머물러 계시는 것보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편히 쉬실 ‘안식처’(place of rest, 대상28:2, NIV)를 짓겠다고 하였으나, 하나님이 다윗이 제공한 집에서 쉬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어야 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짓겠다는 다윗의 제안을 속으로 좋으면서 사양하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원하지 않는데 다윗의 성의를 보아서 마지못해 허락하신 것이다. 성전은 성전을 초월하여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건물일 뿐, 하나님이 사시는 집이 아니다.
성전의 이러한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언약궤를 메는 나무로 만든 채(pole)이다. 언약궤를 8명 정도가 앞뒤에서 멜 수 있으려면 채의 길이가 최소한 5m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채를 꽂을 수 있는 고리가 언약궤의 네 모서리에 붙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광야에서 최초로 언약궤를 만들 때, 그 채를 언약궤에서 빼지 말라고 명령하셨다.(출25:14-15) 성전을 지은 후에도 과거의 명령을 그대로 준수하여 채를 빼어 따로 보관하지 않고 언약궤에 꽂힌 채로 그대로 두었다.(왕상8:7-9) 언제든지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만 돌아다니는 분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후에도, 그리고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된 후에도 돌아다니는 분이다. 그분이 사시기에 사람이 지은 집은 너무 좁고 불편하다. 그 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떠나신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에 의하면, 떠나셨다.

성전의 이중적 의미
성전에 관한 위의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와 이를 보관할 성막을 지으시기를 원하셨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 우상이 아니고 성막은 하나님의 이동성(移動性)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돌로 된 집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이동성을 제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과 솔로몬이 성전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허용하셨다.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와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상징하는 한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그러나 언약궤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든지 성전이 하나님이 사시는 집으로 여겨져서,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셨다. 전자의 의미에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등상을 봉안할 집”이지만, 후자의 의미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들” 가운데 하나이다. 스데반의 설교는 두 번째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성전은 서로 상반되는 두 측면을 한 몸에 가지고 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위대한 처소이고, 자칫 잘못하면 우상숭배의 전당이 될 수 있다. 아니 성전에서 제사하는 순간에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화려하고 영광스런 성전 건물에 현혹되어 이를 하나님과 동일시할 수도 있다. 성전은 한편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그 하나님을 대신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신 성전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제3계명을 어기는 것이고, 성전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은 제2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 둘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도 많이 헷갈렸을 것이다. 성전을 사모하고 성전에 와서 예배하는 것은 보이고 만져지는 행위인데, 또한 그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니... 사람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기도 하고 가끔씩 달을 보기도 하였으리라. 어쩌면 이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피조물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성전을 우상처럼 섬기는 일이 도를 넘는다면, 더 이상 초월적인 하나님은 없고 보이는 하나님만 있다면, 그래서 인간이 그를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이는 재앙이다.

그 재앙을 예견하는 사건이 있었다. 다윗은 언약궤와 성막을 좋아하여, 왕이 된 후 곧바로 언약궤를 왕궁으로 모시려 하였다. 백성과 군대를 모으고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왕궁으로 들어오는 도중 사달이 났다. 언약궤를 실은 수레의 소들이 날뛰자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를 붙들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죽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왜 웃사를 죽이셨는가?
거두절미하고 이 사건은 다윗과 그의 왕국에 보내신 경고이다. 만일 다윗이 언약궤를 왕궁에 모셔서 그 앞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늘 경험하고 그에게 순종하려 한다면(예컨대 시131:1-3처럼) 이는 그와 그의 왕국을 위하여 더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언약궤를 이용하려는 마음을 다윗이 품는다면 하나님은 이를 가만두시지 않는다. 언약궤를 통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국론을 통일하고,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가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사용될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언약이, 언약궤를 섬기는 우상숭배로, 그리고 다시 자기 숭배로 전략할 것을 경계하신 것이다.

현대의 우상, 성전에서 사람으로
오늘날 롯데타워나 두바이의 부르즈 알 아랍을 생각하면, 성전은 초라한 돌무더기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3천 년 전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30m 높이의 거대한 건물은 숭배의 대상이 될 법도 하다. 그런데 사실은 성전보다 더 우상이 되기 쉬운 존재가 있으니, 바로 사람이다.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성전이 초월적인 존재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사람은 그 초월을 품고 사는 존재이다. 이교도들은 사람을 닮은 신의 형상을 만들기도 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신의 지위에 올려 섬기기도 하였다. 고대 문명 어느 곳에든지 사람의 형상을 한 신들이 있었고, 대개는 왕이나 장군이 신으로 추앙 받았다.
구약 여호와 종교는 사람을 신성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아브라함이 민족의 시조로서 신앙의 대상이 될 법도 하고, 모세나 다윗과 같은 영도자들이 예배를 받을 만도 한데, 그런 예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아마 구약성경 때문일 것이다. 구약은 위대한 인물들의 죄와 허물까지 낱낱이 기록함으로 사람을 신적인 존재로 취급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구약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출신이 비천하고, 가정사는 복잡하며, 이런저런 고통에 시달리고, 약점이 많았고, 크고 작은 오류를 범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사람 모양의 신에 끌린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천기(天氣)를 주관하는 남신 바알과 여신 아세라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을 둘러싼 나라들의 주신(主神)은 대체로 사람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이 우상들에 현혹되었고 이 때문에 많은 징계를 받았다. BC 8세기경 앗수르와 바벨론을 필두로 대제국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대제국을 건설한 독재자들은 자신을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섬길 것을 신민에게 강요하게 된 것이다. 느부갓네살의 신상(단3장), 로마제국의 황제숭배, 하늘의 아들[天子]이라 불리던 중국의 황제들, 일제의 아미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의 후손인 천황, 독일 제3제국의 히틀러 등이 그들이다. 이들 현인신(現人神, incarnated gods!)들은 민족과 국가의 영광 그리고 군대의 힘과 결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우상숭배가 완성되었다.
대제국 시대를 살아가던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우상에 저항하는 것을 목숨을 건 과업으로 생각하였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으려다가 불꽃이 이글거리는 도가니에 던져지기도 하였고, 로마 황제숭배를 거부하여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무덤에서 살아야 하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사람 형상의 우상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로마제국의 황제를 가리키는 다음 두 구절을 비교해 보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롬13:1,4하)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계13:1,2)

같은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구절인데, 로마서는 하나님의 사자인 그에게 존경과 두려움을 바쳐야 한다고 하고,(롬13:7)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대하여 죽기까지 대항하여야 한다고 한다.(계13:10)

21세기 대한민국의 우상은 무엇인가? 교회의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온 신학자들은 더 이상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지 말자고 한다. 백 번 옳은 말이고, 아직도 본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창피한 일이다. 그러나 마치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진정으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정치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경우도 드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신처럼 모시는 사람도 있고, 대통령‘빠’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 시대 신(神)의 반열에 오른 스타들이 있다. ‘아이돌’은 이름 그대로 우상과 같은 존재이다. 외모도 출중하고, 노래도 잘 하고, 나쁜 일을 할 것 같지도 않은 대중가요 스타나 탤런트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의 인기는 사그라질 줄 모르고, 감수성이 풍부한 선량한 얼굴의 축구 공격수 손흥민도 꽤 오래 갈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은 동경과 선망의 대상일 뿐 그들에게 나의 영혼까지 맡기지는 않는다.

성직자 숭배
우리 시대 우상의 후보가 하나 남았다. 바로 종교지도자이다.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의 경우도 개신교와 유사할 것 같으나 그 깊은 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논할 수 없고, 우리 개신교만 생각해 본다. 성직자는 원래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존재이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회중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신심이 깊은 성도들은 예배를 집전하고 신앙을 지도하는 성직자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보내기 마련이다.
성직자가 우상이 될 가능성은 처음부터 있었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될 수 있었으나, 신약성경이 이를 너무 강경하게 반대한다.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는 늘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고, 바울은 자신의 부끄러운 전력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중세기 교황이나 성인의 위를 받은 사람들이 미신적으로 숭배를 받았지만, 종교개혁과 계몽사상이 이를 혁파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어느 나라, 어느 시대 기독교에서 우리나라 목회자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있었던가? 물론 그 영향력이 자기 교회로 국한되긴 하지만 말이다.

앞서 성전(聖殿)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우상으로 작용을 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성직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대리하여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서 순기능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그가 전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다.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숭배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목사를 모셔서 기도를 받으면 복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미신이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를 가리키는 일을 할 뿐이다.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이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신앙생활 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목회자에 대한 존경이 서로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이 따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두 가지 경우만 살펴보자. 첫째, 목회자가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났을 때 큰 문제가 생긴다. 한 교회를 개척하여 3,40년 목회하던 목회자가 은퇴하면 기대고 있던 정신적 기둥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나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고민을 들어주고, 결혼 주례를 해 주고, 부모님 장례식을 치러준 분이다. 그의 뒤를 이은 후임 목사는 젊고 경험이 없을 뿐 아니라 친밀하지도 않다.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 것도 없는데 봉급은 더 많이 받고, 무임승차한 것으로 보여 공평하지 않다. 구관이 명관이라 성도들은 새로운 목사에 대하여 불만이 많아지고, 그 불만을 은퇴한 목사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안 그래도 새 목사에 대하여 서운한 마음이 있던 옛 목사가 이에 맞장구를 치고, 결국 교회 분란의 불씨로 작용한다. 목회자에 대하여 좀 더 상대적으로 접근하였더라면 문제가 훨씬 덜 심각해질 수 있을 텐데, 분열이 심해지면 급기야 상대를 사탄으로 정죄하는 데까지 이른다.
둘째, 가끔 물의를 일으킨 목사들의 기사가 뉴스에 나온다. 주로 교회 헌금 횡령과 성범죄 문제이다. 법원에서 판결을 받아 복역을 하고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요즈음 하나 더 하여 교회 대물림(세습)이 이슈로 등장하였다. 교회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우리 사회 최대의 아젠다인 ‘공정’에 위반되는 것이고, 교회의 공적 성격을 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교회의 성도들의 대다수는 세상이 비난하는 목회자를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반대하는 자들을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의 자식으로 생각할 정도로 열광적으로 목회자의 편을 든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목회자에게 실망하고 교회를 옮길 것 같은데, 여기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지만 심리학의 ‘인지부조화’ 이론이 가장 그럴 듯하다. 목회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신뢰하던 성도가 목사의 타락에 대한 정보에 접하게 되었을 때, 그 불일치 때문에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들은 자신들이 틀렸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목사의 비행을 강하게 부정하고 이를 합리화하려 한다. 원래 가지고 있던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의 믿음을 합리화하려는 경향은 더욱 강해지고, 이를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성도 강해진다. 원래부터 목회직에 대한 두 가지의 상반된 측면을 알고 있는 성도라면 훨씬 더 공평하게 판단할 수 있을 텐데...

우리도 사람이라
결국 성도들의 판단력을 길러주는 것은 다시 목회자의 몫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여행을 할 때 일어난 일이다. 바울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한 사람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점잖은 바나바는 제우스신(神)이라 하고, 말을 잘 하는 바울은 헤르메스신(神)이라고 하면서,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려 하였다. 이 때 두 사도의 반응을 보자.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행14:14,15)

옷을 찢고 뛰어들었다는 단어들은 매우 강한 뜻을 가지고 있다. “옷을 박박 찢으며 무리에게 돌진하였다.”고 번역하면 좋겠다. 그들이 소리 질렀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이들을 억지로 뜯어말려 겨우 제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오버하는 것 같아 보인다. 우선 제사를 지내게 하고 알아듣게 천천히 말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그들을 신으로 생각하도록 놓아둔다면 복음 전도에 훨씬 유리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두 사도는 복음전도의 효율성을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자신이 우상으로 취급 받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였다. 그렇다. 목회자들은 알고 있다. 아래에 있는 성도들은 위에 있는 목회자와 하나님이 오버랩 시킬지라도, 목회자는 자기 위에 하나님 밖에 없으니 그 앞에서 자신이 우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나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 서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