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문화의 타락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08-11 12:16
조회
124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와 문화의 타락

1. 창조와 타락 그리고 자연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신 후에 이를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천지와 그 가운데에 있는 만물들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꼭 맞게, 질서정연하게, 특별히 인간과 관련해서 인간이 이를 개발하고 사용하며 관리하는 데에 적합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마치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에 ‘자연적으로’ 원의(原義, original righteousness)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만물들은 도덕적으로 중립이었던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의롭고 선하였다. 즉 광대한 자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인간의 다스림에 복종할 줄 알았다.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이 만물들에 생긴 변화가 무엇인가? 인간의 죄와 반역과 함께 만물들도 그 선함을 잃어버리고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으며,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자리에 처하게 되었다(롬 8:20-22). 자연계에도 폭풍과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사람을 삼킨다. 타락 이전에도 이와 같은 자연의 현상이 있었을 터이나 이는 죄의 침입이 없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제 그와 같은 변화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으로서 더욱더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출애굽 당시의 바로와 애굽에 내렸던 저주, 또한 계시록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노). 땅은 저주를 받아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며, 짐승들은 서로 잡아먹으며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 사람에게는 고생과 질병과 해산의 고통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동시에, 천지와 만물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고 있다. 사람에게도 그의 모든 질병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신”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과연 자연만물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작정과 다스림과 보존하심에 의하여 선하게 남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의 손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창조의 선함과 타락 이후의 악함이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

 

2. 문화명령과 문화의 타락

이러한 긴장관계는 자연현상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보여진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문화명령’을 내리시고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그 곳을 보호하라고 명하신다. 물론 그 명령은 타락 이후에도 지속되는 것이다(시 8:6-8).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4장에서 이미 문화의 타락에 대한 기사를 읽을 수 있다.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김을 당한 뒤에 자기를 방어하기 위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문화를 창달한다. 문화건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와 그로 인한 두려움을 만회하기 위한 한 방편이라는 사상을 우리는 창세기 4장에서 읽을 수 있다. 특히 그의 후손 라멕의 아들들의 손에서 목축기술, 청동-철기 문명, 악기 및 장신구와 화장술(化粧術)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러나 라멕이 그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한 일은 사람을 죽이고서는 두 아내를 좌우에 끼고 전쟁의 노래,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다. 창세기 5장-11장에는 계속해서 사람의 딸들의 문화적인 업적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대조적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하여도 동일한 질문이 물어질 수 있다. 문화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창조력의 소산으로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계발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타락한 인간들이 자신의 소외와 죄악을 감추기 위하여 만든 방편인가? 문화에도 역시 자연에서와 같은 긴장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3. 주술적 해결과 윤리적 해결

혹시는 이러한 문화와 문명의 긴장관계를 쉽게 설명해 버리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을 수 있다. 그 첫째의 가능한 시도는 피조물과 문화현상 중에서 어떤 것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어떤 것은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구분을 지어놓는 것일 것이다. 이를 주술적(magical) 해결 방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법이 그와 같은 시도의 예라고 볼 수 있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정한 병과 부정한 병, 정한 시기와 부정한 시기, 정한 장소와 부정한 장소, 정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을 의식적, 주술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음악은 좋고 어떤 악기는 근본적으로 마귀의 것이며, 술. 담배는 그 속에 악마의 기운이 들어가 있는 것이고, 바코드의 가운데 666의 마크가 새겨져 있으며, “라이언 킹” 영화는 마술사가 나오므로 악마적인 것이고, 어떤 직업은 기독교인이 가져서는 안되고 어떤 직업은 괜찮으며,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고 십의 구는 세상의 것이며....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구분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은 인간의 ‘윤리적인’ 죄의 깊이를 고려에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선포하는 사제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죄악성을 계산에 넣어야 하며, 정한 것 속에 안주하려는 자기만족이라는 위선을 생각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고 싶은 바리새주의적이고 ‘청교도주의적’ 독선을 피하기 어려움을 알아야 하고, 또한 이러한 자기만족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배타와 결합되는 데서 오는 사회적인 위험성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주술적 자동주의는 종교적 심미주의자들에게 궁극적으로 회의를 가져다주며, 암 하아레츠들에게는 좌절과 방황을 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죄가 예레미야 시대의 ‘성전신학’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며, 바리새주의의 독선과 위선이며 중세말 로마카톨릭 신학이 낳은 종교적 회의주의의 근원이 된 것이다.
문화에 있어서의 원의(原義)와 죄의 오염의 긴장관계의 해소를 위한 두번째의 가능한 시도는 ‘윤리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즉 온 세상의 만물들과 갖가지 문명의 이기들은 중립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고 이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선악이 구분된다는 이야기이다. 돈 그 자체가 악이 아니고 “돈을 사랑함”이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음악의 곡조보다도 그 가사에 의해서 또는 부르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그 음악의 좋고 나쁨이 가려진다는 것이다. 힘(혹은 폭력)도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이 아니고 그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한다. (이런 주장의 논리를 밀고 나가면 모든 종류의 마술적인 요소들은 기독교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한다. 교회가 성전이라서 하나님이 기도를 이곳에서 더 잘 들어주신다든지, 성직자가 축복권을 가지고 있다든지, 주일이 구별된 날이라든지 하는 주장은 미신적인 것이고 성경적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역시 설득력이 없다. 우선 문명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 사람에 의해서 건설되어진 문명 자체를 그렇게 명확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주창자들이 생각해 낸 반신적(反神的)인 제도로서 그 궁극적 책임이 그 주창자에게와 추종자에게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이미 만들어진 공산주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악한 속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정치와 경제와 문화는 악한 인간들의 도덕적 죄악성의 총집합체로서 제도를 창출해 내고 그 제도는 다시 죄를 즐겨하는 연약한 인간들에게 방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도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역시 죄의 오염의 심각성과 그 앞에서의 인간의 나약함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인본주의의 아들딸들인 것이다.

4. 다니엘과 바울의 경우

창조(와 문화)의 선함과 타락 이후의 피조물의 악함이 대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대표적인 예가 음식의 법의 문제이다.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대조, 이는 분명히 음식물 속에 어떤 도덕적인 가치가 들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니엘은 이 음식의 규례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이 제공하는 음식이 구약의 규례에 어긋나는 것을 알고 채소와 물만을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막 7:15-16)고 말씀하심으로써 음식물의 비마법화(disenchantment)의 근거를 마련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이 누가와 사도 바울이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정하다 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한다. 바울은 이방인과의 접촉에 장애가 되는 음식의 규례에 대해서 과격한 파괴를 주장하였고 그 논리의 배후에 창조의 선함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그러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도 그 가운데에 마술적으로 우상의 기운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고전 8장). 그는 더욱더 직접적으로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3-4)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과격한(radical) 태도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에도 나타나고 있으며(골 2:16-17), 또한 왕과 정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선을 이루는 자니라”(롬 13:4)고 말할 때에 그는 모든 제도의 선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신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글자 그대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게 되면 위에서 말한 윤리적 해결에로 기울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명백한 위험은 이미 지적한대로 죄의 오염의 심각성과 인간의 연약성(vulnerability)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또한 생기는 질문은 그러면 구약에 있는 음식법을 비롯한 의식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미개하고 미신적이고 마술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성전과 제사장과 제사법과 십일조와 음식법과 같은 규례를 주어서 묶어 놓아야만 했다는 말인가?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았던” 다니엘은 이러한 미신적인 사고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얻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 이는 계몽된 인간을 너무 믿는 사고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제한하는 일이다.

5. 창조의 선함과 타락의 긴장관계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의 선함과 타락이후의 죄의 오염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분명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 둘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원리를 적어 보았다.

(1) 죄의 영향력은 피조 세계와 문화와 인간의 제도들을 죄로 물들여 놓았다. 이에는 인간의 죄성이 가장 큰 원인이며 이 모든 사상과 제도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영들의 세력 때문이다.

(2) 그런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어떤 분야에는 이 악의 힘이 더욱 강력하게 미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어떤 분야에는 악한 힘이 자제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음식의 문제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악에 의해서 오염이 쉽게 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인을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방선교시대에는 그 악의 힘이 하나님의 은혜로 감소되었다. 또한 알콜은 성서시대에는 거의 죄의 오염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있어고 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논하는 언사를 성경에서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지만, 산업화 도시화 이후에는 술이 갖는 죄의 오염도는 매우 높아진 것이다. 노예제도도 성경에서는 비난을 받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19세기에도 이를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을 인용하는 미국 남부신학자들의 태도는 옳다고 볼 수 없다.

(3)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윤리의 우선권(priority)이 다른 항목에로 전이 될 때, 이미 있던 주술적인 죄의 오염으로부터 그 문화나 물건을 해방시키기 위하여서 우리는 창조의 선함에 그 정당성을 호소한다. 음식 규례가 그 적합성을 상실하였음을 간파한 사도바울은 모든 창조의 선함을 들어 이것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한다.

(4)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창조물의 악의 오염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할 수 없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사탄의 전략에 따라서 또 다른 창조물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 있어서는 그 윤리의 우선권이 음식 규례에서 부도덕과 음행의 문제로 옮겨간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다.

 

6.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러면 현재 우리에게 있는 문화현상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창조의 선함과 타락 후의 죄의 오염이 긴장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모든 피조물과 모든 문화현상들이 그 자체로서 피조물로서의 선함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사탄의 도구로서 작용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이를 판단할 것인가? 몇 가지 고려해야 할 바가 있다.

(1) 직관적 판단: 인류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판단의 기준들이 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악을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더러움, 시끄러움, 부조화와 같은 것들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간에 그 악함을 대강은 알 수 있다.

(2) 성경의 참고: 성경이 피조계와 문화계의 선함과 악함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될 수 없고 역사적 상대성을 가진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이는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성경의 충족성을 몰라서가 아니다.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한계 때문이다. 성경을 진지하게 보려하면 이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우상의 제물이 구약에서는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으나 신약에서는 신자들의 자유에 맡겨진다. 구약의 노예제도는 신약에 와서 폐지되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선악의 내용이 아니라 판단의 원리이다.

(3) 역사에서의 그 문화현상의 역할: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악의 역할을 담당해 온 것은 지금도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예를 들어 술 문제가 그러하다. 성경에서는 거의 금지되지 않으나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되면서 자주 술은 마귀의 도구가 되어 왔다. 현재 우리들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피를 먹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공히 금지되어 있으나 현대에도 이것이 적용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피를 먹는 것이 한 때는 우상숭배와 동일시되었으나 이제는 피에 이런 효력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4) 시대적 조류: 동시에 현대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이 시대를 흐르고 있는 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알 때에 우리는 무엇이 악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정신이 어떻게 죄와 결합되어 악한 제도를 산출하고 악한 문화를 양산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우리의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문화적인 현상들을 볼 때에 두 가지의 상반된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로서 이를 즐기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을 맛보는 것이다. 사실은 가장 악한 것처럼 보이는 문화에서도 하나님의 선함을 발견할 수 있다. 폭력적인 영화 속에도 권선징악이라는 하나님의 법의 일부가 반영되어 있고, 현대의 기술과 예술가의 창조력의 결합을 봄으로써 재충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죄의 오염이 곳곳에 스며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폭력적인 장면이 우리의 무의식에 끼치는 영향 외에도, 헐리우드 영화의 제3세계의 문화 잠식, 영화라는 틀 자체가 가지고 있는 (또는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어 왔던) 비성경적 가치관--보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면 인생이 행복해 진다는 등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에서 금지시켜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목회적인 혹은 개인적인 결단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결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위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신중히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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