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오늘을 사는 삶: 히브리서에 나타난 과거와 현재의 긴장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08-11 12:13
조회
112
영원한 오늘을 사는 삶: 히브리서에 나타난 과거와 현재의 긴장

 

과거와 현재 그리고 기독교 신앙

기독교 신앙은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우상과 구별되는 것은 항상 살아계셔서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는 분이시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보호하시며, 거룩케 하는 분이시다.
기독교 신앙이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나 사상과 그 근거와 내용에서 매우 다르다. “미래는 신뢰할 것이 못되니 오늘을 즐기라”(carpe diem)는 로마의 서정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의 경구와 같은 염세적 현실주의가 아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어떤 원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결합된 것이 인간이므로, 고정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식의 불교적 허무주의도 아니다. 혹은 과거의 소유에 얽매이지 말고 열린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라는 실존주의의 ‘도상(途上)의 실존’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현재를 강조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변할 수 없는 확고한 구원의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 구원의 기초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 그리스도의 순종과 순종으로 말미암은 의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된 칭의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확신(assurance)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객관적으로 일어난 사건인 십자가를 통한 용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현재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은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부르심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고, 회심함으로써 그 구원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믿은 자는 이미 죄 사함을 받았고, 이미 새 생명을 얻었으며, 이미 부활하였으며, 이미 천국에 올라간 자이다. 과거의 사건을 현재 받아들이며, 이미 받아들인 현재의 상태가 미래까지 계속될 것이다.
과거에 일어난 구원의 사건(historia salutis)을 현재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신자가 당연히 자연스럽게 거치는 과정이다.(ordo salutis) 그러면서도 과거를 강조하는 것과 현재를 강조하는 것 사이에는 모종의 긴장이 있다. 과거를 강조하는 것은 우리 구원의 수동성을 말하려 할 때가 많고, 현재를 강조할 때는 신자의 자발성을 말하려 할 때가 많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구원을 받아들이라는 것과 지금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 가운데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전자가 초월에 무게를 두고, 후자는 내재에 무게를 둔다고 할 수도 있다. 명제형식(proposition)의 교리(dogma)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자에 방점을 찍을 것이고, 믿음의 결단과 순종의 윤리를 강조하는 사람은 후자에 방점을 찍으려 할 것이다. 과거 구원의 사건을 (잘못) 강조하면 그리스도가 두드러지고, 현재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성령님이라고 (잘못) 구분하기도 한다.
과거의 그리스도의 사역과 현재 성령님의 사역 혹은 우리의 반응이 잘 조화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만일 이 두 가지 강조 중 어느 하나가 상실된다면 문제가 생긴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이미’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는 한 축을 잃어버리게 되면, (실존주의자들이 아무리 멋진 말로 묘사한다고 해도) 우리의 영혼은 닻이 끊어져 버린 난파선과 같게 될 것이다. 반대로 만일 우리의 구원의 현재성이 무시된다면 신앙은 답답한 바리새주의로 빠질 것이다. 이 과거와 현재가 천의무봉(天衣無縫)으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양 극단의 오류를 왔다갔다하며 반복할 뿐이다. 물론 교회 역사의 한 시점에서 한 쪽이 너무 강조되어서 오류에 빠졌다 싶으면 다른 쪽을 강조함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곤 한다. 예를 들어 구원의 객관성을 극대화하여 과거 신앙의 유물을 강조하려는 ‘성전신학’(Temple Theology)에 대하여, 예레미야나 에스겔은 구원의 주관성과 현재성을 강조함으로 균형을 추구하려 하였다. 반면 구원의 주관성을 강조하다가 인간의 공로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예정이나 칭의와 성화의 확정성(definiteness)을 강조하기도 한다.

히브리서에서의 구원의 현재성

성경 전체가 우리 구원의 과거와 현재, 수동적 수납과 자발적 믿음과 순종, 이 양자를 조화롭게 설명하지만, 히브리서가 특히 그러하다. 히브리서에서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제사로 인하여 이미 완성된 것이라는 주제가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사가 ‘단번에’ 드려진 ‘영원한 속죄’라는 사실이 히브리서에서만큼 강조된 다른 성경은 없다.(7:27; 9:12; 9:26; 9:28; 10:2; 10:10 등) 구원의 단회성과 영원성을 강조하는 구원파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이 히브리서가 아니던가!
그리스도 죽음의 역사성과 더불어 히브리서에서는 구원의 현재성이 그와 꼭 같은 비중으로 강조되고 있다. 히브리서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일을 끝내고 편히 쉬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예수는 영원히 (살아) 계신”(Jesus lives forever) 분이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하여 “항상 살아서(always lives)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는 분이시다.(7:24-25)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do have)” 것이 중요하며, 그는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serves) 자라.”(8:1-2)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을 묘사하는 모든 동사의 시제가 현재임을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중보(intercession) 교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연합시키는 교리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과거와 그 구원의 현재 적용을 연결시키는 교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현재 사역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이 현재 무엇을 하는가가 또한 똑같이 중요하다. 가장 논쟁적인 구절은 6:4-6의 배교자들이 다시 회개할 수 없다고 한 구절이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선언한다. (10:26) 로마 당국의 박해로 많은 배교자를 낸 상황(12:4), 또한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매너리즘(2:3), 지속적인 죄의 유혹(3:13) 등을 배경으로 한 경고이다. 그러면서도 위의 구절들은 구원을 얻는 것이 단지 과거 십자가 사건에 근거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죄의 선언이 아니라, 그 복음에 “믿음을 화합”(combine with faith)해야 함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인 믿음과 순종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로 구원의 현재성과 관계가 깊다. 히브리서의 믿음은 단지 과거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순종이 동반되어야 한다.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순종하는 자에게이고(5:9), 불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마련한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다.(3:18; 4:11)

히브리서3:7-4:13의 해석

구원의 현재성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본문은 3:7-4:13이다. 이 본문을 간략히 해설함으로써 본 소고를 끝맺을까 한다. 이 본문은 시95:7하-11의 말씀을 주석하는 구절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의 본문을 히3:7-11까지 글자 그대로 인용하는데,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as the Holy Spirit says) 라는 말로써 시작한다. 이 말씀을 과거 어느 시대에 시편의 저자가 쓴 말이 아니라, 성령이 지금 하시는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그 전제 하에서 본문을 재해석한다.
우선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던 조상들과 같이 ‘오늘날’(Today) 시편의 시대에 불순종하지 말라는 다윗의 말이,(참고. 시95편에는 이 시편이 다윗의 시라는 어떠한 암시도 없으나, 히4:7에서는 ‘다윗의 글’이라고 밝힌다.) 바로 히브리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준 것이라고 단정한다. “오직 오늘(Today)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3:13) 다윗 시대의 ‘오늘’이 말씀하시는 성령님에 의하여 히브리서를 받는 사람의 ‘오늘’로 해석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living, 4:12) 현재도 역사하신다는 사고가 관통하고 있다.
더 어려운 것은 3:18 이후의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는 시편 말씀의 주석이다. 안식을 약속하는 네 개의 본문이 등장하기 때문에 복잡하다. 다음 네 경우의 안식을 연대순으로 살펴보자.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히4:4, 창2:2인용)
“여호수아가 안식을 주었다.” (히4:8; 수23:1 참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히4:5, 시95:11 인용)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히4:10)

자세한 논의 과정은 생략하도록 하고, 히브리서 기자의 논의를 따라가서 안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후 일곱째 날에 모든 일을 쉬시고 안식하셨다. 이는 모든 인류에게 약속하신 안식의 모형이 되었다. 여호수아가 땅을 정복하고 분배한 후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었지만, 그 안식은 참된 안식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 시대보다 300년 이상 후에 쓰여진 다윗의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은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여호수아가 진정한 안식을 주었다면 이런 말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호수아가 준 것은 외적으로 전쟁이 멈추었다는 것을 표현할 뿐 진정한 하나님의 안식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안식은 언제 오는가? 바로 지금 믿은 자는 그 안식에 들어간다.(4:3)
4:9-11상을 다시 한 번 보자.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언뜻 보면 이 구절은 앞으로 우리가 장래에 천국에서 누리게 될 소망으로서의 안식을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미 이 안식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10절의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쉬느니라.”의 시제를 주목하라. ‘들어간’은 부정과거 분사이고 ‘쉬느니라’도 부정과거이다. 이를 번역한 번역본은 많은 경우에 현재완료로 번역을 하였으나, NIV와 RSV는 현재시제로 번역하였다. 후자는 아마도 4:3 “이미 믿는(부정과거)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현재)”를 염두에 둔 번역일 것이다. 어쨌든 이 구절들은 모두 미래에 누릴 안식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식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이미 안식에 들어가 있지만, 동시에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도 주지 못하였고, 다윗 시대의 사람들도 누리지 못하였던, 하나님의 안식을 예수를 믿는 우리가 지금 누릴 수 있고 누리고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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