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발전과 여성크리스천의 역할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08-11 12:09
조회
122
한국사회의 발전과 여성크리스천의 역할

 

서 론

지난 10여 년 간 개신교 인구의 감소 특히 젊은 층의 감소는 앞으로 기독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매우 우려될 만한 일이다. 30대 이하의 젊은 층에서 남녀가 고루 감소하였고, 이게 40대 이상의 증가폭을 능가할 정도이다. 나이가 젊을수록 점점 더 감소는 심해진다. 한 국가 교회성장의 원인을 추정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이나 교회의 수적 감소의 원인을 평가하는 것도 어렵다. 개인의 신앙적 열심과 사회적 정서 등이 맞물린 복잡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혹은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고 불리고 싶은 사람은) 간단하게 성령의 주권적 일하심이라고 말해 버리고 만다. 수적 감소의 원인이 복합적인 만큼 해방 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급속히 성장한 원인도 매우 복합적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독교가 당시 우리나라의 가장 큰 과제였던 조국 근대화와 정신적인 맥을 같이한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기독교가 과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국가를 위하여 공헌하였던 것에 대한 기억도 한몫을 하였다.
지난 20년간의 감소의 원인은 무엇일까? 일단 가장 떠오르는 것은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세속적인 삶의 방식이 주로 젊은 층에 뿌리박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2만 불이 되면서 소비 위주의 생활습관이 자리 잡았다. 이제는 골치 아픈 진리의 문제라든지, 죄와 회개, 구원과 내세와 같은 종교적인 언어가 설 자리를 잃었다. 청소년은 고강도 입시교육에 시달리며 이에 대한 탈출구로서 ‘쾌락’을 택하였다. 대중문화의 도움을 받아 성적 방종을 통하여 자신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신형 모델 핸드폰과 MP3, 아이팟에 열광한다.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20대도 4천 원짜리 점심을 먹고는 4천5백 원짜리 스타박스 커피를 들고 다닌다. 결혼식은 호텔을 고집하고, 아무리 없어도 스팀세탁기와 HD텔레비전은 혼수품으로 장만한다. 젊은이의 코드는 ‘럭셔리’와 ‘쿨’이다. 없어도 없는 체 하지 않는 것이 ‘쿨’한 것이고, ‘럭셔리’한 명품 핸드백 하나 정도는 들어줘야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결혼하고 아이를 좀 키웠다 싶으면 이제 재테크에 몰두한다. 돈이 좀 모이면 다음은 해외여행이다. 건강을 관리하는 데서 지나쳐 몸에 대한 강박적 집착을 가지고 남성 중심의 사회가 구성한 여성의 육체관리를 위하여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인다.

이런 생활습관은 남녀가 모두 공유하는 것이다. 여성도 세속주의의 전파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앞장서 있다는 말이다. 무릎이 닳은 곤색 양복에 빨간색 넥타이를 매고 여자집사 몇 사람과 함께 진한 연기를 내뿜는 회색 봉고차를 타고 심방하는 목사의 모습이 고리타분하다. 넓고 높은 진고동색 강대상에서 끽끽거리는 마이크를 앞에 놓고 높은 톤으로 거창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논하는 설교는 멀티미디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교회에 나가서 ‘주여삼창’ 하면서 열광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전혀 ‘쿨’한 것이 아니다. 지하철역에서 나눠주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류의 전도지가 먹히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세속주의의 즐거움을 빼앗기기 싫은 것이다.
세속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구원을 전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다시 국민소득이 5천 불 대로 주저앉으면 될 것인가? 세속주의가 만연하게 된 원인을 생각해 보면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여성들이 세속주의(secularism)에 물들어 기독교를 멀리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지금까지의 한국교회 가르침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으며 열심히 기도하고, 물질적인 복을 하나님이 주신 복과 동일시하고, 열심히 살라고 가르쳤다. 여자들은 남자가 밖에서 하는 일에 대하여 간섭하지 말고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오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영화, ‘투캅스’의 안성기) 그리고 자녀들에게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좋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축복해 주었다. 이제 경제가 발전하면서 돈과 시간이 풍성해 졌다. 고등학교까지는 신앙에 열심 내기를 원하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가면 자유롭게 된다. 이 젊은이들이, 또 이들을 대학에 보내 놓고 삶의 목적을 상실한 이들의 엄마들이, 있는 돈으로 자신의 인생을 즐기게 된 것이다. 일부 교회를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질도 떨어진다. 각 교회 여전도회 사업 중 가장 중요한 사업이 봄가을 나들이가 아닌가?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만연한 세속주의에 대한 대답으로서 두 가지 정도를 제시하려 한다. 이는 이제까지 한국의 강단에서 설교되어 왔던 삶의 방식 또한 기독교가 이상으로 삼았던 것들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과거 3,40년 한국 기독교의 가르침이 오늘날의 세속주의와 그로 인한 교회의 약화를 가져왔다면, 이제 우리는 비슷한 기간 동안 이를 벌충해야 한다. 그 효과가 우리 시대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한다. 사실은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정신인 ‘실용주의’에 기초한 것이며, 이 ‘실용주의’가 기독교의 세속화를 부추기는 가장 큰 적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여성에 초점을 맞추겠지만 세속주의에는 남녀 구별이 따로 없기 때문에 남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 대답들은 여성에 대한 한국기독교의 해석과도 맞물려 있다. 결국 교회의 습속을 지탱해 주는 가장 강력한 기둥은 설교이기 때문이다. 한국 강단에서 설교되고 있는 여성은, 전통적 한국 사회가 여성을 보는 시각이 그러하였듯이, 대단히 단선적이다. 여성을 두 가지 유형으로만 나누어 본다. 현모양처 형의 ‘착한 여자’인가 공지영의 소설 『착한 여자』를 연상케 한다. 여자가 착하다는 것은 순종적으로 사는 대신 남자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일종의 거래라고 한다. 남자에게 의존하여 착하게 사는 것 대신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것을 택하였다.
아니면 ‘팜므 파탈’(femme fatal)인가이다. 국가에 충성하다가 죽은 유관순이나 아들을 대학자로 키워 낸 신사임당이 닮아야 하는 전형이지만, 기생이나 자유부인 혹은 기지촌 여성들은 모두 사회의 필요악이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도 사라, 리브가, 한나, 마리아는 모두 좋은 여성이고, 이세벨, 고멜은 팜므 파탈 형이다. 성경에 나오는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우리 시대 여성들의 역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첫째, 한국교회의 여성 성도들은 가족이기주의를 넘어 사회적 현실문제에 눈을 떠야 한다.

한국교회가 세속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다시 가난하게 되거나 아니면 청빈한 삶을 사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풍요롭게 사는 것이 죄악이고 가난하게 사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기 때문이다. 풍요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가난하게 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혹은 전 지구적으로 그 풍요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론 사이더, 한화룡 역,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요한 그리스도인』 (서울: IVP, 1998)을 참고하라.

물론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긴 하지만, 여성들은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아직도 남성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소수자’로 살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소수자들이 사회적 의식에 먼저 눈을 뜰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성들이 사회적 약자임을 알고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고전적으로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남성과 결혼해서 신분을 상승시키는 것일 수 있다.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그러하고, 배용준을 스타로 등극시켰던 1995년 TV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 등이 그 예이다. 요즈음은 여성들이 결혼보다는 스스로 독립한 커리어우먼이 되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런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은 남성보다 먼저 사회의식에 눈뜰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더 억압을 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 사회에서의 미군의 의미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 준 사건들은 기지촌 여성들의 살해사건이다. 최초의 사건은 1967년 동두천 김춘자(당시 21세)라는 여성이 동거하던 미군에 의하여 살해된 사건이다. 이 때 동료 3백 명은 소복을 입고 상여를 맨 채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미군부대 안으로 몰려 들어가 1시간 동안 연좌데모를 했다. 1992년 ‘윤금이 살해사건’이 일어났다. 미군클럽에 종사하는 윤금이를 미군병사가 처참한 모습으로 살해되었다. “우리 딸이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라는 유인물에서 볼 수 있듯이 기지촌 여성도 우리 민족이라는 의식이 생긴 사건이었다. 그러나 살해범은 불구속 상태에서 1년6개월 동안 재판을 받다가 15년 형을 받았고, 결국 2006년 가석방되어 출국하였다.

한국에서 노동조합운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은 1970년 전태일의 죽음 이후일 것이다. 특히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여사는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사회의식이 싹텄고 민주화유가족협의회(민가협)를 창설하여 이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를 이렇게 만든 동력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우선은 하나님의 은혜고, 또 한 가지 잊어버리지 않고 사는 것은 태일이가 죽으면서 한 말이지요. ‘엄마, 끝까지 싸워서 나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 찾고 인간답게 사는 그날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그 말”이라고 하였다. 운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처럼 이소선씨도 정치권에서의 유혹이 많이 있었지만, ‘엄마 나 죽고 나면 물질이나 많은 다른 유혹이 온다 해도 그것을 이겨야 엄마도 살고 나도 산다.’는 말을 상기하며 물리쳤다 한다. 아들의 피를 팔아 편안하게 살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자신이 사회적 약자임을 알고 사회적 의식에 눈을 뜨는 여성들에 관한 묘사가 많다. 즉 자기가 이렇게 어렵고 비참하게 된 것이 자기 개인의 문제뿐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또한 그 사회 속에서 고통 하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 온갖 소수자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들과 연대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한나의 예를 들어보자. 한나는 자녀를 생산하지 못함으로 남편이 ‘씨받이’를 얻어 아들을 낳았다. 그 슬픔 때문에 성전에 가서 소리죽여 울고 자신의 원통함을 토하였다.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받고 아들 사무엘을 낳아 키워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하였다. 전형적인 신사임당 스토리이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상해 주신다는 설교의 텍스트로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녀가 후일 지은 기도문이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삼상2:7-8) 이 시의 내용은 작게는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이 다스리는 불의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이요, 크게는 신명기역사(Deuteronomic history)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한나는 단지 자신이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 훌륭한 자식을 낳고 남편과 첩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와 억압당하는 자에 대한 의식(意識)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한나는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 달라는 연대의식에서 이런 기도를 올렸다.
한나의 이 기도문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매그니피캣(Magnificat)에서도 반복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1:51-53) 여성들이 자신의 약자로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어떻게 사회적 의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또 성경이 이들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를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들과 함께 광야로 내몰렸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하갈, 아들을 낳을 권리를 요구하였던 유다의 며느리 다말, 이방인으로 가난한 자로 여성으로 삼중고를 겪던 룻, 여성에게도 기업을 달라 요구한 슬로보핫의 딸들 등등. 조금만 상상력을 동원하여 성경의 행간을 읽는다면 놀라운 이야기들이 펼쳐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의 딸 미갈은 이런 의미에서 한나의 대척점에 있다. 특권을 잃는 것을 경험하였음에도 계속 그 특권의식에 집착해 있었을 뿐, 사회적인 의식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국 역사의 예를 들어 보자.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은 최용신이라는 실제인물을 모델로 하였다. 최용신은 1909에 태어나서 1935년까지의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다. 감리교의 협성여자신학교에 재학하면서 농촌계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며 일신의 영달만 도모한다면 저 버림 받은 농촌 아이들의 까막눈은 누가 뜨게 해줄 것이냐”고 말하였다. 하나님과 시대가 자신을 앞서 배우게 한 것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이들을 깨우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학교를 중퇴하고 농촌운동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고, YMCA의 파송을 받아 안산의 샘골이라는 곳에서 본격적인 농촌운동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야학으로 시작하였으나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정식 교사(校舍)를 지어 농촌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한글 강습, 산술, 보건 및 농촌상식과 기술을 가르쳤고, 무엇보다도 애국심과 자립심을 북돋우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당시 김활란은 샘골에서의 최용신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2년 5개월이 지났을 때 그는 자신의 지식을 좀 더 길러야 함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길에 나섰다. 그러나 채 3개월이 못 되어 각기병에 걸렸다. 그는 죽더라도 샘골에서 죽겠다고 하며 샘골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교사와 상담자로 헌신하다가 병이 도져 죽었다.
최용신의 이러한 헌신은 단순한 낭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윤정란에 따르면, “1928년 중반을 전후로 기독교 여성들이 농촌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첫째 한국교회의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의식 전환에 따른 것이었으며, 둘째는 기독교 여성들의 농촌여성문제에 대한 재인식, 셋째는 사회주의 여성들과의 갈등으로 인한 독자적인 운동노선의 선택 등에 의한 것이었다.”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모든 여자성도가 사회운동을 위한 투사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여성의 관심은 (또한 남성의 관심도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가정이어야 한다. 가정을 생각하는 것과 가족이기주의가 된다는 것은 다른 말이다. 가정을 생각하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국제중학교에 보내고 외국어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지만 그 사회적 맥락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남편이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여 생활비를 벌어오는지를 알아야 한다. 남편에게 하는 말 한 마디, 자녀를 키우면서 교훈하는 것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앞날을 결정하는 말들이다. 요람을 흔드는 손이 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교회 봉사보다 복지선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현재 위치가 어떠하며 어떤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알면서 그 위치에 맞는 사명을 개발하여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교역자가 심방을 하고 심방한 가정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지만 무엇이 진정한 복인지는 알아야 한다. 최소한 사회적으로 죄를 짓는 일에 복을 빌어주는 일은 안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삶과 가정의 사회적 의미를 알게 될 때 예수 믿는 사람은 결코 소비적 향락을 마냥 즐길 수는 없다. 세속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그 풍요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 의식이 없이 풍요가 주는 죄악의 낙을 누리며 사는 ‘바산의 암소’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암4:1) 또한 온갖 장식품으로 자기를 치장하고 뽐내는 ‘시온의 딸들’에 대한 경고도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다. 사3:16-4:1을 보라. 그 남편들은 가난한 자의 포도원을 삼키고 그 물건을 탈취하여 집에 쌓아 놓았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고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하는 사람들이었고,(사3:14-15) 그 아내들은 남편의 풍요를 가지고 사치하는 사람들이었다.

둘째, 한국교회 여성성도들은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여성성을 회복해야 한다.

개혁신학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대비시켜 말할 때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에서 남성과 여성에 분명한 차이를 두고 있지만, 남성성과 여성성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규정하지 않는데다가, 남성성과 여성성은 주로 사회와 문화에 따라 규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가 남성 위주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남성 위주 사회에서 쓰였기 때문에 여성성을 고양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재구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성경의 충분성(sola scriptura)에 위해를 가할 염려가 있고 또한 그렇게 말하는 사람 자신의 남성성/여성성 구분을 성경보다 우위에 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평하게 말하여 성경이 남성 위주의 문화에 의하여 쓰이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성경의 유기적 영감을 믿는 개혁주의자들이 남성 위주의 문화에 의하여 쓰였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반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복잡한 해석학적, 세계관적 문제가 걸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성경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 별로 중요한 차이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칼 융의 이론과 같이 남성 속에도 여성성(anima)이 내재해 있고, 여성 속에도 남성성(animus)이 있는 것이다.
사회가 분화되고 복잡해지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분화되면서 남성성/여성성의 구분이 요구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여성성이 열등하다고 여겨졌던 데 대한 반대로서 말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성이라 하면 수용성(receptiveness), 포용성, 수동성, 부드러움, 평화주의 등을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남성성은 강직함, 율법주의, 능동성, 전쟁 등이 생각난다. 생태주의를 평화주의 또한 여성주의와 연결시키려는 사람도 많이 있다.
여성과 영성(靈性)을 연결시키는 사람도 많다. 남성 이미지를 가진 성부 하나님은 엄격하고, 공의롭고, 사람들을 심판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고, 율법과 제도를 제정하는 반면, 여성 이미지를 가진 성령은 품어주고, 충만케 하고, 위로하고, 만족케 하고, 감싸주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남성적인 종교로 보고 여성적인 동양종교를 이와 대비시키는 것이다. 심지어 복음주의권에서도 이러한 이분법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순복음이나 성결교의 학자들이 자신들이 여성적임을 강조하기 위하여서일 것이다.
한국교회의 경우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한 대단히 왜곡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여자성도의 숫자가 남자성도 숫자의 두 배 이상이다. 통계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크지 않지만 (2005년 남성은 4,003,536명, 여성은 4,630,902명), 실제 교회에 출석하는 숫자나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숫자를 볼 때에 그렇다. (실제로 느끼는 남녀비율로 볼 때, 8백6십만이라는 숫자도 부풀려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남자는 터프한 공적 영역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투쟁해야 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종교와 교육을 담당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 되었다. 근대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분담되어, 남성은 위와 같은 남성성을 극대화시켜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고, 여성은 사적인 영역에서 자녀교육과 도덕과 종교 등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도 성경이 말하는 남성과 여성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각각의 특징이 공존하고 있다. 종전에는 사디즘적인 남자부흥사의 설교와 매조키즘적인 여신도의 맹종이 대세를 차지했다면, 최근 대형교회의 설교는 좀 더 여성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자에게 안수를 주지 않는 보수적인 교회가 율법주의적으로 흐르고 있으면서, 많은 여자목회자의 경우 자칫 여자가 남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여성이 남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 즉 여성이 여성의 고유한 영역을 버린 채 남성과 같은 역할을 하려는 것은 자칫 참자기가 아닌 거짓자기가 되기 쉽다는 면에서 경계해야 한다. 여성목사들이 남성 위주의 교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남성의 목소리를 낸다든지 하는 것이 이에 해당되겠다. 물론 남성이 여성화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 남성과 여성의 역할, 남성성과 여성성이 (성경의 의도와는 다르게) 분화되었으니, 이제 분화된 것을 통합해야 한다. 교회의 직무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남성목회자가(혹은 여성목회자가) 자신의 속에 있는 아니무스(혹은 아니마)를 발달시켜, 상대 성(性)에 대한 이해를 가지는 것이다. 물론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이 부분은 다른 교역자들이 채워줄 수 있겠다. 성경의 ‘창조질서’(creation ordinances)가 남성의 대표성을 말하고 있는 듯하니, 남성이 안수를 받고 목회의 대표가 되고 여성이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직무에서의 통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가정과 교회에서의 여성성의 재발견이다. 여성만이 여성성을 가질 필요는 없고, 남성도 내재해 있는 아니마를 개발해야 한다. 공격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여성성의 담지자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성을 포기하고 남성처럼 되는 것이야말로 여성에 대한 모욕이요 여성성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반대라고 생각한다. 여성성의 강조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거부감에 대하여 폴 투르니에도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여성성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부성의 근원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꼭 같은 이유로 모성의 근원인 하나님을 어머니라고도 부를 수 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라는 단어에 여성성도 포함되어 있고, 성경의 다수를 점하는 아버지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부성을 포기하는 페미니즘 신학에서 많이 사용하던 것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말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23:37)라고 하셨다. 솔개가 날아와서 병아리를 채가려 할 때, 어미 닭이 자기의 날개를 펴고 병아리들을 모으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설사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새끼를 보호하려는 모성 본능을 들어 예수님은 자신의 마음을 설명한다. 또 시편 131편을 보자. 2절에,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라고 한다. 대제국을 경영하며 온갖 음모와 술수 정치 속에서 시달리던 다윗 왕이 때때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얻는 모습이다.

황석영의 『바리데기』

최근 나온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는 여성성이 어떻게 우리 사회의 구원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어 소개한다. ‘바리데기’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베풀어지는 ‘진오구굿’ 등의 무속의식에서 구연되는 무가(巫歌)이다. 지역에 따라 또한 구연자에 따라 상당히 다르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옛날 한 나라의 국왕 부부가 딸만 계속 일곱을 낳자, 왕은 일곱째로 태어난 딸을 내버렸다. 버림받은 딸은 많은 고생을 하며 천우신조로 자라났다. 왕이 병이 들었는데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특별한 약이 필요하다. 만조백관과 여섯 딸이 모두 약 구하러 가는 것을 거절하지만, 버림받은 막내딸이 찾아와 약을 구하겠다고 떠났다. 막내딸은 약을 관리하는 사람의 요구로 고된 일을 여러 해 해 주고 그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은 뒤 겨우 약물을 얻어 돌아온다. 국왕은 이미 죽었으나, 막내딸은 신이한 약물로 아버지를 회생시켰고, 그 공으로 막내딸은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바리데기 공주 설화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일반은총’의 역사적 산물이다. ‘바리데기’ 설화가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없으나, 유일한 구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흔적(vestigium)의 하나이다.
이러한 바리데기의 모티브를 가지고 황석영은 80년대에 태어나서 ‘고난의 행군’ 시대를 거쳐 거칠고 슬픈 삶을 산 주인공 ‘바리’를 빚어내었다. 바리는 북한의 청진시 간부의 일곱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들을 기대하였던 어머니는 낙심하여 의욕을 잃고, 낳은 지 얼마 안 된 바리를 산속에 버렸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아기를 물어다가 품게 되고 이를 발견한 할머니가 길렀다. 부모가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고, 낳자마자 버림을 받았다고 하여 ‘바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닐곱 살 때 쯤 외삼촌이 당의 사업을 결손내고 도망친 탓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수백만 명이 굶어죽는 고난의 행군 시절에 식구들이 죽고 바리는 살 길을 찾으러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바리는 샹과 쩌우 부부를 만나 마사지 일을 배워 함께 생활하였다. 쩌우가 사기를 당하여 그 빚을 떠안고 이를 갚을 길이 없게 되자, 샹과 바리는 영국으로 밀항을 한다.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오랜 항해에 시달린 바리와 샹은 마침내 영국에 도착하여 바리는 다시 발마사지업소에 취직하였다. 파키스탄인 알리를 만나 결혼하여 잠시 행복하였으나, 아프간 전쟁이 터지면서 동생을 찾으러간 알리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고 그 사이 샹 때문에 알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배신감과 절망감에 바리는 집 안에서 울다가 자기만 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긴 꿈을 꾼다. 이 꿈은 설화의 모티브에서 따온 무속적인 꿈으로서, 죽은 자들의 바다를 지나 성 안에 들어가 생명의 물을 꺼내오는 꿈이다. 이 꿈을 꾸고 나서 바리는 샹을 용서하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때마침 전쟁이 진정돼 가면서 남편 알리도 바리 곁으로 돌아온다. 얼마 후 바리와 알리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폭탄테러를 당하였다.
마치 설화의 바리데기 공주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고통의 현실을 자기 속으로 승화시켰고, 이로 인하여 치유하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북한의 기근으로 인한 기아, 남과 북의 대립, 한국과 중국의 갈등, 서구문명과 동양문명의 차이,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영국의 테러 등의 고난의 현실을 온몸으로 수동적으로 당하였다. 바리는 어떤 혁명을 꿈꾼 것도 아니고 무슨 조직을 한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의 갈등과 고통과 슬픔을 자기 가슴으로 수용하고 포용함으로 치유의 도구가 된 것이다. 발을 만지면 그 사람의 과거가 보이고, 이를 치유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아비가일의 경우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의 예를 들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다윗 시대에 아비가일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광야를 헤맬 때의 일이다. 처음에는 다윗 혼자 광야를 헤매었지만 나중에는 그의 가족이 그를 찾아왔고, 억울하게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유민이 되었고 다윗이 그들의 대장노릇을 하였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느덧 600명이나 되었다.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목축을 할 수도 없는 곳에서 이들이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좋은 말로 하면 민간경찰이었다. 때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침략자들을 징벌하고 혹은 블레셋을 공격하여 재물을 빼앗기도 하였다. 광야의 도둑과 짐승으로부터 광야에 흩어져 사는 여러 사람, 여러 부족을 보호해 주고 그 대가를 받았다. 나쁜 말로 하면 삥 뜯는 조직폭력배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다윗의 ‘나와바리’에 광야의 부호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다윗과 그의 동료들은 나발의 양떼를 지켜주어 다른 도적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해 주었다. 이제 상납금을 받을 때가 되었다. 좋게 말했다.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다.” 미련한 사람 나발은 이 부탁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모욕하였다. 다윗이 성질이 났다. 모욕을 못 참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굶어 죽게 생겼다.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고 명령하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다윗은 지금 이성을 잃은 터프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로 인하여 기름부음 받은 자의 정체성을 잃었다. 이런 식으로 자기의 원수들을 평정하다가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을 모두 없애 버리려는 사울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 때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다.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떡, 포도주, 양, 볶은 곡식, 건포도, 무화과 뭉치 등 상납금에 해당하는 것을 챙겼다. 그리고 다윗 앞에 엎드렸다. 총기 어린 눈으로 다윗을 지긋이 쳐다보며,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지혜롭게 말하였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습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의 생명을 찾을찌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실 것입니다.”(삼상25:28-31)
다윗은 원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광야에서의 많은 고생에서도 주옥같은 시편을 남겼다. 그런데 삶의 고통 때문에 추하게 바뀌었다. 아비가일은 그의 내면에 있는 본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해 준 사람이었다. 왕이 될 분이 인생에 오점을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라고 한다. 간접적으로 다윗의 물매돌 사건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잠시 더 생각하게 하였다. 대단히 온유한 말이었지만, 그 온유한 말이 다윗의 마음을 바꾸고, 그의 영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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