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차장의 영어 단어장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10-06 19:04
조회
133
버스 차장의 영어 단어장

우리 어렸을 적의 버스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좌석버스와 입석버스가 있었는데 좌석버스는 가운데 문이 하나 있었고, 입석은 앞과 뒤에 있었다. 각 문에는 여자 차장(나중에 순화되어 ‘안내양’ 혹은 ‘안내원’이라고 불렸다.)이 서서 돈이나 회수권을 받았고, 사람이 다 내리고 타면 ‘오라이’ 하면서 차 문을 두 번 두드린다. 회수권 안 내고 타는 개구쟁이 중고생들을 색출하는 것도 그녀들의 일이다. 10장이 한 묶음인 회수권을 절단하여 탈 때마다 한 장씩 내는데, 어떤 녀석은 10장을 11장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차장들은 이 역시 귀신 같이 잡아낸다.

차장의 일 가운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일은 ‘푸시맨’ 역할이었다. 러시아워 때는 버스 한 대에 100명도 더 타야 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생각하지만, 우리 버스의 3분의 1 크기 밖에 안 되는 필리핀 짚니에 수십 명이 매달려 가는 광경을 본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책가방을 손에 들지 않아도 둥둥 떠다녔다. 등교시간, 출근시간에 늦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발 한 짝이라도 버스에 걸쳤고, 차장이 이 사람들을 다 감싼 채 양손으로 버스 문 옆의 세로 봉을 잡으면, 버스는 출발한다. 소위 ‘개문발차’(開門發車)이다. 운전기사가 재치 있게 차를 왼쪽으로 휙 기울이면 문에 매달려 있던 손님과 차장이 모두 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때를 놓칠세라 차장은 버스 문을 잽싸게 닫는다. 거의 신기에 가깝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버스 차장들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정도의 여성 근로자였다. 무작정 상경하여 더러는 공장에 취직하고 몇몇은 이리로 흘러들어온 시골처녀들일게다. 휴일도 없이 하루 12시간, 14시간 이상 온 종일 서서 이 일을 하니 얼마나 피곤하고 힘이 들었을까? 밤이 되면 문에 기대서서 꾸벅꾸벅 조는 차장들이 많이 있었다. 그렇게 피곤한데도 한결같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영어 단어장이다. 같은 나이 여학생들이 하얀 교복을 입고, 재잘거리며 학교 이야기, 공부 이야기, 남학생 이야기할 때, 얼마나 학교에 가고 싶었을까? 차장으로 일해서 돈 벌어, 시골에도 부쳐주고, 조금씩 저축하였다가, 기회가 되면 자기도 중고등학교 공부하기 위하여 꾸벅꾸벅 졸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40년이 지난 오늘,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아니 가난한 사람이 열심히 일해도 지위가 상승되기 어려워졌다고 해야 더 맞겠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하여 열심히 사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무시하기까지 한다. 화이트칼라는 다른 사람을 부리고 돈을 굴리고 미꾸라지처럼 법망을 피하여 큰 이익을 얻는다. 대기업은 신규 사업에 투자하는 것보다 경제위기에 경매 물건을 사서 자산을 늘이고, 돈 좀 있는 투자자들은 자기 아파트가 한 해에 몇 억 오른 것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랑한다. 공직자들이 지위를 이용하여 돈을 벌고, 가난한 사람들은 로또에 희망을 걸고, 젊은이들은 게임과 영화에 몰두한다.

노동자가 땀 흘려 일하고, 회사원은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성실하게 출근하고, 기업가는 새로운 상품과 유통을 창조하기 위하여 밤을 새우고, 주부들은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하여 절약하고, 학생들은 진리를 알기 위하여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이다. 자녀들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가르치고, 땀 흘리는 것이 아름다운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기독교계도 마찬가지이다.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은 평범한 성도, 평범한 목사들이다. 전도와 설교에 최선을 다하고, 성도들 한 영혼을 위하여 가슴 아파하며,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매일 새벽 기도하는 목사들이다. 그 목사의 인도를 믿고 노방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고, 교회 바닥을 걸레질하고, 꼬박꼬박 십일조를 바치는 성도들이다. 그 기반 위에 노회와 총회가 있고, 신학교가 있고, 대형교회가 있고, 기독교신문과 방송이 있고, 선교단체가 있고, 기독교 연합단체가 있고, 글을 써서 이름을 날리는 기독교 저술가가 있고, 가짜 뉴스 생산자가 있다. 이 기관들에 종사하는 이들의 봉급과 사례비와 강연료와 홍보비와 해외여행비와 자녀유학비가 평범한 성도들의 주머니에 의존하고 있다.

자산의 기본 가치는 늘어나지 않는데 그 자산에 기초한 금융상품과 그 금융상품의 파생상품, 또 파생상품을 만들다가, 어느 순간 버블이 꺼져 버린 2008년 금융위기가 생각난다. 투자은행 애널리스트들과 정부 관료와 관변 학자들의 범죄에 가까운 도덕적 해이가 밉고, 그들의 말에 속아 집을 잃고 텐트를 치고 사는 몰락한 중산층의 불운이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땀 흘려 일하고 아끼고 저축하는, 작은 희망을 품은 노동자들로부터 일할 의욕을 앗아간 것이다. 혹시 한국 교회의 목사들이 한 영혼을 돌보는 평범한, 그러나 가장 어려운 목회 사역에 대한 의욕을 잃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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