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생명, 그 길항(拮抗) 관계의 극복: 하박국서(書)를 중심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08-11 11:52
조회
1135
화해와 생명, 그 길항(拮抗) 관계의 극복: 하박국서(書)를 중심으로

 

'화해'에서 '생명'으로

21세기의 문지방을 넘어선 지금 20세기를 아주 투박하게 정리해 보자. 한 마디로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된 세기였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 전쟁의 끝자락에 일어난 양차대전을 비롯하여 동서냉전으로 인한 대리전(代理戰)이 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문명의 충돌”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정치/종교/문화적인 갈등의 골은 계속 깊어만 간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사회적 갈등의 양상이 20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성장한 공산주의와 미국에서 수입된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인하여 전쟁을 경험하였다.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세력과 진보 세력의 대립, 지역 간 차별, 남녀의 성차별, 세대 간의 부조화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갈등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시대를 위한 신학적 키워드는 당연히 ‘정의’와 ‘평화’이다. 일찍이 칼 바르트는 ‘화해’ (reconciliat-ion)를 신학의 중심주제로 삼아 그의 『교회교의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며 그 통합의 근저에 하늘과 땅의 화해가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그 화해의 상징이라고 한다. 신정통신학을 근간으로 한 1967년 미국연합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파트는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God's Work on Reconciliation)이고 두 번째 파트는 “우리의 화해의 사역”(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과 동료 인간에 등을 돌려 세상의 착취자와 약탈자가 됨”으로 “반역과 절망과 분리” 가운데서 인간성을 상실하였다고 한다.(9.1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에게 화해하도록 하셨다”고 고백한다.(9.07)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공동의 복지를 위하여 자원을 개발하고 보호하며,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힘쓸” 의무가 주어졌다고 한다.(9.17) 우리가 구체적으로 힘써야 할 것으로써 인종과 민족 간의 차별 종식, 국가 간의 전쟁 방지, 빈부차이 완화, 남녀 차별 극복 등을 들고 있다.(9.44-9.47)
복음주의권에서도 동일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동일한 대답을 제시한다. 1974년 150개국 3,700명의 세계복음화국제대회의 대표가 합의하고 서명한 ‘로잔 언약’(The Lausanne Covenant)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하게 언급한다. 하나님은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려는”의도를 가지고 계시며, 그 의도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인종, 종교, 피부 빛, 문화, 계급, 성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한다. 또 1986년 미국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의 “Our World Belongs to God” 이라는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표현된 고백문에서도 동일한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규정한다. 개혁주의자들은 ‘샬롬’이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하기 좋아하는데, 이 단어는 전쟁이 없는 평화라는 소극적 의미에서 더 나아가 정의가 회복되어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는 평화를 의미한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 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등 제3세계 신학은 말할 것도 없다. 1986년에 제정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성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교훈에 따라... 남을 이용하고 남으로부터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사랑의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의가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기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6장 7조) 또한 분단된 조국이 하나가 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고백하였다. “모든 원수관계를 없게 하고, 화해의 대업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민족을 신앙과 자유의 토대에서 화해케 하고, 이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사명을 다해야 한다.”고 한다. (8장 6조)

21세기로 들어오면서 사상계의 키워드가 ‘생명’으로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생명에 관한 학문적 탐구와 신문방송의 기사가 넘쳐난다. 환경오염이 심각해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사회적 대응이다. 혹은 갈등과 대립을 치유하는 것이 단순히 정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는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나온 대안이기도 하다. 모더니즘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책을 모더니즘 내부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를 모더니즘의 분파 정도로 생각하여 생태계 위기의 원인을 기독교에서 찾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기독교 신학계는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기독교 신학 안에서 생태학적 단초를 재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세계교회협의회는 1991년 제7차 총회 때,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 (Justice, Peace and Integration of Creation)을 정식 의제로 삼음으로써, 생명을 정의, 평화와 더불어 논의의 중심에 두기 시작하였다. 이후 몰트만 등의 서구 신학자들이 성경에 기초하여 정교한 생명신학을 발전시켰다. 최근에는 생태학적 생명신학이 영성운동, 여성운동과 결합하여 세계 신학계의 큰 흐름을 주도해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민중신학을 대신하여 생명을 주제로 삼아 논의를 계속해왔다. 특히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이정배는 기독교의 생명사상과 불교, 동학, 증산도 등 우리나라 고유의 생명사상을 연결시키려 시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1980년대 이후 함석헌, 김지하 등의 사상가들이 제공한 생명사상의 단초를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 의제를 찾지 못하여 방황하던 진보적 사회사상가들이 환경운동과 녹색운동에 뛰어들면서 논의는 이제 신학계를 넘어서서 사회사상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 중이다. 냉전과 계급투쟁으로 일관된 20세기가 화해(reconciliation)와 평화(shalom)를 기독교신학의 중심주제로 다루었다면, 생명파괴 현상이 보편화된 21세기에 생명사상은 활황기를 맞았다. (필자가 지금 말하는 ‘생명’은 우리 대학의 신학적 이념인 ‘개혁주의생명신학’의 ‘생명’이 아닌, ‘심층생태학’(deep ecology) 혹은 ‘생태학적 생명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 소고의 결론 부분에 가서 어떻게 ‘개혁주의생명신학’이 ‘심층생태학’을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샬롬과 생명의 길항관계

모든 중요한 개념들이 그러하듯이 서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긴장도 있기 마련이다. 21세기에 ‘생명’이 사회적 키워드로 작동하게 된 원인이 바로 20세기가 만든 문제에 대한 대답이 불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계급’이다. 경제적인 계급 뿐 아니라, 노동자와 사용자, 도시와 농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남자와 여자, 영남과 호남 등의 사회적인 갈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격차가 해소되고 간격이 좁혀지는 평등을 지향하며, 평등을 위하여 때로는 거대하고 때로는 미세한 투쟁이 필요하다. 모든 투쟁에는 엄격한 윤리와 치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화해’나 ‘샬롬’과 같은 이상주의적인 구호로 정의와 평등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메마른 평등보다는 충만함을, 투쟁보다는 포용을, 윤리보다 영성을, 사회과학적 분석보다 인문학적 상상력을 선호한다. 계급 혹은 계층 자체를 별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민중만이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기농 식단과 ‘녹색성장’과 영성운동을 위하여 삶의 여유가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심층생태학의 경우 동물과 식물 그리고 무기물과 기계에까지 생명을 부여하는데, 민중이라는 계급은 이미 의미를 상실하였다.
과연 전쟁과 평화, 양극화와 같은 문제가 생명학을 통하여 극복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칫 이러한 거대한 문제들로부터 회피하여 영성운동의 좁은 영역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를 갖게 된다. 실제 세계에 어떠한 구체적 해답도 제시해 주지 못하는 내용이 없는 생명이어서는 안 된다.

작금의 신학적 논의에서도 이런 길항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말의 민중신학이 과연 그 수명을 다하여 생태학적 생명신학에 그 자리를 내주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새롭게 제기될 수 있다. 생명신학이 민중신학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이라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민중의 영역이 다양화하고 광범위해졌기 때문에 다시 복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복음주의권에서도 비슷한 논의가 있을 수 있는데, 새롭게 펼쳐지는 영성신학의 난점으로서 윤리적인 결함을 보인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바로 여기에 새로운 기독교적 사회윤리를 제공해야 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만물에 호흡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믿으면서, 동시에 그 생명에 적절한 질서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Creation Ordinance)를 고백한다. 생명의 각각의 종(種)에 의미를 부여하고 목적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계시인 규범으로서의 성경계시가 있다. 인간과 자연, 하늘과 땅, 남자와 여자, 권위자와 민중, 이 관계들에 억압과 폭력이 없는 생명의 순환과 발현을 전제하면서도, 이 생명들 사이에 목적과 질서가 주어져야 한다. 21세기 생태학적 생명학으로부터 도전과 영향을 받으면서도, 무차별적이고 미분화된 생명이 아닌 질서 있는 세계를 상정해야 한다. 이럴 때 비로소 반(反)생명적 요소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의미한 투쟁이 가능하게 된다. 요컨대 '화해'와 '생명'의 길항관계가 큰 차원에서 수렴되고 극복되는 것이다.

하박국서(書)에 나타난 샬롬과 생명의 조화

하박국서는 샬롬과 생명이 조화를 이루는 좋은 전형을 제공해 준다. 하박국서는 대략 7세기 경 바벨론 제국이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온 세계를 정복하려 할 때쯤 쓰여졌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몰락하고 요시야나 혹은 여호야김이 유다를 다스릴 때이다. 하박국이 보는 세상은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고통의 시대이다. 우선 유다에서 행해지는 악의 목록은 ‘간악,’ ‘패역,’ ‘겁탈,’ ‘강포,’ ‘변론,’ ‘분쟁’ 등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은 시행되지 못하고 재판은 왜곡되었다.(1:2-4)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대제국 바벨론의 침공이다. 그들은 표범과 같이 빠르고, 저녁 굶은 이리보다 사납고, 독수리와 같이 날래다.(1:5-11) 국내적인 모순과 제국주의적 압박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 모르지만, 이들의 운명은 낚시에 걸린 물고기와 같은 신세이다.
하박국은 이런 세상을 바라보면서 계속 질문을 던진다. “어느 때까지리이까?” “어찌 잠잠하시나이까?” “이것이 옳으니이까?” 그가 얻은 답이 2:5-20에 기록되어 있다. 바벨론의 멸망에 관한 예언을 들으면서, 그 결론으로 “그 속에는 생기(루아흐)가 도무지 없느니라.”는 신탁을 받는다. 그 ‘생기’는 하나님이 주신 목숨이며, 성령이 주시는 생명이다. 불의와 강포와 분쟁에 대하여 질문하였는데, 그 답이 생명이다! 유다의 불의한 귀족들이 아무리 간교하여도, 바벨론의 침략군이 아무리 광분하여도, 그 속에는 생명이 없다.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의 신을 삼을”(1:11) 뿐, 결국 세상의 불의와 박해를 이겨낼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인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알게 된 하박국은 생명력으로 충일하다. 그 유명한 노래를 부른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3:17-18) 특히 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에 주목하자. 우아한 자태와(아2:9) 준족(駿足, 시18:33)을 자랑하면서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산을 나는 듯이 뛰어다니는, 작지만 강한, 그리고 생명력 넘치는 암사슴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불의와 갈등과 전쟁의 해결책으로서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생명을 해답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하박국이 얻은 생명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생명이 아니다. 그가 생명으로 충일한 것은 내용이 꽉 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속에 가지신 ‘생기’는 윤리적 교훈과 현실 정치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 찬 묵시인 것이다. 하나님은 성루에 서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는 하박국에게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명백한 계시를 주셨다. 더디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묵시인 것이다. 악한 이들은 교만으로 자신의 음식을 삼지만,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결론을 포함한다.(2:1-4)
예언자들이 받은 묵시는, 흔히 ‘생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허한 주장처럼, 결코 현실정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아람과 북이스라엘 동맹군이 유다를 침공할 때 앗수르와 연합하여 이들을 물리치지 말 것을 간하였고(사7장),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포위에 대하여 항복이 살 길이라고 하였다.(렘21:9) 바벨론 침공과 멸망의 날을 다 들은 하박국은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나는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인내로 기다리련다.”(3:16,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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