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08-11 11:44
조회
1033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IMF 10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IMF를 일찍이 졸업하였습니다. 국민 소득은 두 배로 늘었고 산업구조가 선진국형으로 재편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도록 경제 제도가 진화하였고, 이에 따라 국민의식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경제 타령이고,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빈부의 격차는 늘어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시름은 깊어만 갑니다.

문제는 ‘불안’입니다. 영세 구멍가게나 비정규직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도 미래가 불투명하고, 잘 나가는 엘리트 회사원도 고용의 불안정에 시달립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믿을 것은 부동산 밖에 없기 때문에 부동산에 돈을 묻어둡니다. 가능한 한 투자와 고용을 줄이고 많은 이익을 남기려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불안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더 가속화될 것입니다.
이명박대통령은 파이를 키우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서민들에게 파이 부스러기라도 돌아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애초에 공약한 747정책이 난관에 봉착하면서, 파이를 키우는 일도 그리 쉽지 않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국제적인 경제여건이 나아져서 그의 임기 내에 4만 불 시대가 도래한다 할찌라도 불안은 가중될 것입니다. 양극화와 이로 인한 파멸로 갈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경제를 둘러싼 이념 논쟁은 그만 하였으면 합니다. 이미 10년 간의 좌파정권 실험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좌파의 논객들은 참여정부가 제대로 된 좌파 정책을 취한 적이 있었는가 하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좌파적 이념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노전대통령이 그 이념에 충실한 정책을 취하지 못하였을까요? 좌파적 정책이 이제 막 사회의 주류에 진입한 386세대의 ‘불안’을 떨쳐버리고 확신을 줄 수 있을만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386세대가 자녀를 키우게 되었을 때 영재교육과 특목고 열풍이 불었고, 영어 발음을 위하여 혀를 수술하는 엽기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1억을 모으자, 10억을 모으자 하면서 부동산과 펀드 사이를 오갔던 것도 이 세대입니다.
사실 ‘불안’의 문제는 경제학이나 사회학의 문제를 넘어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인간학의 문제요, 더 나아가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신학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경제학으로 나아가야 이 문제가 해소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평안이 단순히 실존적인 고민으로부터의 해방이나 이웃과의 다툼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불투명한 불안의 상태를 견디는 것으로 평안의 개념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경제적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불안이 해소된 사람의 삶의 방식을 두 가지 제시하려 합니다. 첫째, 재물보다 영혼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면화시키는 것입니다. 사촌이 산 아파트가 한 해에 일억이 올랐어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돈 있는 사람이 대우 받는 것을 보아도 속으로 ‘흥!’ 하고 지나가라는 말입니다. 돈 있는 사람이 질병을 고치고 돈 없어서 제때 치료 받지 못하여 죽었다 할찌라도, 어차피 천국 가는 것은 똑같다는 믿음을 가지자는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가진 자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립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게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여 정의와 평등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기업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사업을 키우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지 말고 사람을 살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읍시다.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 많은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 하지 맙시다. 부자는 세금 내는 것을 아까워하지 말고 있는 돈을 풀어 가난한 가정 학생들의 등록금을 줍시다. 가난한 사람은 떡 한 조각이라도 이웃과 나눕시다. 초대형교회 목회자는 교인을 더 모으려 하지 말고 교인을 떼어주어 교회를 개척합시다. 큰 교회에서는 복지법인을 만들어 복지사업을 하고 작은 교회에서는 동네에 사는 독거노인을 찾아뵙시다.

나 한 사람이 이런 일을 한다고 해서 사회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입니다. 내가 이런 삶의 양식을 가지게 될 때 나의 영혼이 삽니다. 그리고 혹시 압니까? 기독교인들 모두가 이런 식의 삶의 양식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우리의 멸망을 지연시켜 주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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