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에 관하여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08-11 11:42
조회
1668
방언(方言)에 관한 질문

(질문) 최근 두 권의 서로 다른 입장의 책이 출판되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한 권은 김우현감독의 『하늘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부족한 기독교』 3부작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옥성호의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입니다. 김우현, 『하늘의 언어』입니다.
방언에 대하여 서로 완전히 다른 견해를 쓰고 있습니다. 과연 방언이 하나님과 내밀하게 대화하는 성령의 은사인가요, 아니면 이방종교의 습성에 불과한 것인가요?

(대답) 저도 그 책들을 읽었습니다. 과거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1980년대 중반쯤이었습니다만, 그 땐 정말 방언이 한국교회의 가장 큰 이슈였습니다. 순복음교회가 그 외연을 넓혀 장로교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복음교회는 미국에서 방언운동을 강조하는 오순절파의 하나로서 한국에서 아주 큰 세력을 펼치고 있었던 교단이지요. 지금은 순복음교회의 방언 운동이 장로교회에까지 영향을 주어서, 대다수의 교회와 교단들이 이를 허용 내지는 묵인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1980년대는 방언 운동이 생소하였던 때이고, 이것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웠습니다. 신학교수와 학생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전통적인 장로교의 신학을 주장하는 교수님들과 오순절 운동을 수용하려는 교수님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오순절 운동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고, 고신 측에서 가장 반대하였습니다. 고신의 교수 중 한 분이 방언운동을 옹호하다가 제명되었을 정도입니다. 반면 실제 교회에서는 목사님들이 방언을 허용하는 추세였고, 방언을 받은 젊은이들이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방언을 격려하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뒤 약 20년 동안 방언 문제에 대하여 별다른 논의가 없다가, 최근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분들이 책을 연이어 펴냄으로써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김우현감독의 『하늘의 언어』는 방언과 관련하여 자신이 겪은 일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있었던 그대로의 일을 구체적인 사건과 사람을 들어 말하기 때문에 한 번 붙들면 놓기 힘듭니다. 저도 단숨에 읽었습니다. 김감독은 영상만 잘 만드는 게 아니라 글도 상당히 간결하게 잘 쓰시는 분입니다. 방언을 통하여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것을 초청하는데, 이 책을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모두 방언을 사모하게 될 정도로 파워가 있습디다. 이 책의 초판이 2007년 7월에 나왔는데, 제가 산 책은 2008년 3월에 나온 것으로서 56쇄입니다. 여덟달 만에 56쇄를 찍었다는 것은 기독교 출판 역사상 드문 일일 것입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갈망을 가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작은 자 한 영혼을 위하여 기도할 때 방언이 주어져 그의 영혼과 삶이 치유되는 장면, 출판사 ‘규장’의 직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과정,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방언에 대한 책과 방언을 통하여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 등이 쓰여 있습니다.

방언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방언이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는 김우현을 비롯한 방언 옹호자들의 견해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늘의 언어로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이는 고전14:2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의 언어,” “성령 충만의 기초와 통로,” “영광의 보좌로 나아가는 통로,” “사랑의 비밀을 하나님께 고하고 나누는 밀어(密語),” “사탄의 방해 없이 아버지의 심장으로 곧바로 가는 길,” “하나님의 근본적인 지식 가운데 들어가는 출입구요 네비게이션,” “율법적인 삶에서 은혜로 들어가는 길,” 등으로 규정합니다. 방언을 통하여 예언, 치유 등의 각종 은사가 임하고, 이를 통하여 교회의 영성과 능력이 회복된다고 합니다.
방언파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방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방언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反)방언파’라고 해 두지요. 반방언파에서는 기본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방언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은 분명 15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반방언파에서는 고린도교회에서 있었던 방언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였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의 신전에서 이미 방언이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 방언이 아니면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없었을 것이고, 이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고전14:22)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논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에 (또한 예루살렘 교회에) 이런 식의 외국어방언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스펙터클한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계시(성경)가 완성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줄 필요가 있어서 외국어로 말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전14:2의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는 말씀은 방언의 정의(定義)라기보다는 비꼬는 투의 말로써 “도대체 너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대체로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방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비난하는 것으로써, 깨닫지 못하는 말이 아닌 깨달은 말이 중요하다는 것을 바울이 강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개혁주의를 위한 변명

성경(고린도전서)의 방언이 “하늘의 언어”인가 “외국어”인가? 고린도전서 14장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잠시 후에 답하기로 하고, 반방언파가 말하려고 하는 주장의 핵심과 그 정당성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개혁주의자들의 강조점에 대하여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은 대체로 반방언파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방언파는 부흥운동의 후예 중 일부라고 생각하시면 되겠고, 반방언파는 부흥운동에 의심을 가지고 있던 개혁주의자의 후예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개혁주의자는 전통적으로 신앙의 체험보다는 지성적인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개혁주의의 시조 칼빈은 믿음의 출발점을 아는 것(notitia)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그게 그런 뜻이었구먼’ 이라고 알아들어야 믿음이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assensus) ‘아, 그래 그거 참으로 맞는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믿음의 최종 단계는 의지적인 신뢰(fiducia)입니다. ‘그러면 내가 이제 꼭 교회에 나오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야지.’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출발점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 사건을 지성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파는 이러한 지성적인 면보다는 감정과 체험에 의존합니다. 감정 혹은 체험이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체험을 우위에 놓다 보면 십자가를 지성적으로 동의하고 믿는 것은 사라져 버립니다. 십자가 없는 체험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김우현의 책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비밀’의 내용이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인데, 방언을 통하여 얻어지는 체험은 십자가의 대속과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대리속죄를 말하지 않고 십자가를 따라 고난 받는 삶의 아름다움에 대하여만 이야기합니다. (한국교회사 속에서 신비적 체험을 통하여 고난의 십자가를 맛볼 것을 강조한 사람은 이용도(1901-1933)입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진리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비밀]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창세전에 예비하신 놀라운 계획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영광스러운 소망이 그리스도를 닮는 삶이다... 우리가 영으로 그 비밀을 말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그 역사들이 능력으로 풀어지는 것이다.” (『하늘의 언어』, p. 129) 개혁주의자들이 방언파, 혹은 그 이전의 부흥운동가 대하여, 일관성 있게 의심하는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방언 혹은 신비적인 체험을 강조하다가 십자가의 대속을 잃어버릴까 염려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고전14:2)이기 때문에 사탄이 그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방언파에서 주장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에 착안하였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하지요. 그런데 ‘비밀’이란 말이 무엇일까요? 신약성경에는 ‘비밀’(mystery)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또한 그 당시 그리스-로마 시대에 많이 쓰이던 종교적 용어의 하나입니다. 모든 단어가 그렇듯이 그 용법은 다양합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비밀이라는 뜻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은 잘 못 알아듣는 말이라는 뜻, 또한 심지어 종교적 제식을 통하여 밀교(密敎, esoteric)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지식까지 포함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신다고 할 때는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말로 가르치심을 의미합니다. 바울 서신에 나오는 대부분의 ‘비밀’의 의미는 역시 하나님의 하시는 일로서 사람이 자기의 지식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비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구원입니다. 대표적으로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라고 말씀한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비밀’이라 할 때는 그 내용이 잘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일이라든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숨겨둔 계획이라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비밀의 내용입니다. 그러니 방언파에서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에 관한 비밀을, 나에 대한 하나님의 내밀(內密)한 계획 따위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반성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리적인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방언을 통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한단 말인가? 규장의 직원 70명이 다 은혜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어보지도 못하였는가? 나도 방언을 통하여 항상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며 살고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방언이 외국어든지 ‘카할리’든지 ‘랄랄라’든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반문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요.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실용주의(pragmatism)는 정치판에서 듣는 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물론 모든 진리는 실용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진리를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할 방향이 아닙니다. 김우현감독의 책을 읽으면서, ‘야 과연 그렇게 쉽고 좋은 방법이 있다면 나도 방언을 전도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아는 많은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방언을 받아 변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김감독님이 다소 과장을 한 면도 있을 것 같다는 의문도 듭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몇 번 감독님을 만난 저로서는 그 분의 순수성을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인격이 순수하고 방언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실감하다보니 다른 면들을 보지 못할 가능성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규장출판사의 상업주의가 그 회사 대표가 방언을 받음으로써 극복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 같은 것도 제 마음속으로 해 보았습니다. (상업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돈이 없이 어떻게 회사를 운영하겠습니까? 단지 잘못하면 자신이 추구하는 상업적 원리를 하나님의 뜻이라는 고상한 말로 포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용적인 변화를 가지고 모든 진리성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는 영․혼․육 삼분설을 주장하면서 곧 재림이 임박했다는 사람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집회에 가서 사람들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또 잠시 후 김기동 귀신론이 한국교회를 휩쓸었습니다. 저도 그 집회에 참석해본 적이 있는데, 제 자신이 큰 은혜를 받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놀라운 일들을 보았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박옥수의 구원파 운동이 불과 같이 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제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어떤 신앙 좋은 전도사님과 권사님 두 분이 박옥수 구원파로 갔습니다. 그 교회에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던 청년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사님이 아무리 기도해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과 권사님이 ‘영원 속죄’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율법이 아닌 복음에 대하여 말하자, 그의 정신적인 질병이 고침을 받는 것을 제가 목격하였습니다. 얼마 후에는 손가락으로 암 덩어리를 긁어내고 생수를 발라서 치유하는 할렐루야기도원이 유행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교회를 휩쓴 것은 소위 ‘내적 치유’ 열풍이었습니다. 문제가 있는 많은 개인과 가정이 내적 치유 집회에 가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부부간에 화해하고, 변화가 되어 다시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하였습니다. 또 잠시 후에는 빈야드 운동이 있었습니다. 기도하여 뒤로 넘어뜨리고 화끈한 성령체험을 하고 변화가 있었습니다. L.A. 은혜교회가 트레스디아스(T.D.)를 통하여 은혜를 체험하게 하고, 러시아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최근에는 예배갱신 운동이 활발히 일면서 청년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목요집회니 화요집회니 하는 데 삼삼오오 찾아다니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체험을 너무 강조하면 안 됩니다. 심지어 무당의 체험도 기독교인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유명옥이라는 유명한 무속인이 쓴 『집없는 무당』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서울: 새로운사람들, 2000). 얼굴도 예쁘고 일류대학에서 독일어 통역을 전공한 여자 유명옥이라는 사람이 썼습니다. 그는 저 유명한 무당 김금화의 신딸이기도 합니다. 그가 무당이 되기까지 어떤 역경을 걸어 왔는지, 어떻게 신 내림을 받고 반항하였는지, 그 영혼의 방황이 어떠하였는지, 무속인으로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 제목이 『집 없는 무당』인데, ‘무당’(巫堂)을 집이 없다는 뜻의 ‘무당’(無堂)이라고 말놀이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쓴 글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의 삶이 세속적이지 않습니다.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간절하게 기도하면 그의 마음이 맑아지고, 그 날 있을 일에 대하여 어떤 ‘영적’인 대비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서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와 함께 기도하고, 때로 굿을 하면, 그의 상처가 말끔히 씻기고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가 겪은 수많은 영적인 체험과 사람을 치유한 내용이 감동적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 모든 기독교 체험 운동들에 저도 한국교회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관심도 가져 보았고, 집회에도 참석해 보았고, 이를 통하여 변화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저와 매우 가까운 분들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는 제가 다니고 있는 교회, 그 교회의 배후에 있는 신학에 대하여 의심하였습니다. 장로교회에서 이런 스펙터클한 변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저 매 주일 나와서 따분한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봉사는 하지만 큰 기쁨이 없고, 때로 고난을 당하더라도 이를 견뎌야 한다는 설교를 듣습니다. 교회가 관료주의로 변하고, 지도자들은 추태를 부립니다. 개혁주의의 힘이 어디에 있는가? 실용성이 있는가? 저 자신이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실용적인 것(즉 사람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항상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일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서 이것을 강조하고 저것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자칫 진리의 핵심을 빼 놓고 변두리를 강조할까 염려됩니다. 앞서 말한 구원파, 김기동파, 할렐루야기도원, 내적 치유, 빈야드, 트레스디아스, 예배갱신 운동 등이 진리의 일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을 변화시킨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일부일 뿐, 성경 진리를 그들의 신학 위에 세운다는 것을 잘못입니다. 때로 성경의 진리가 (저는 그 성경 진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믿는데요.) 실용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사람을 전인적으로 살릴 수 있는 것이 개혁주의라고 믿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집에서 밥을 먹는 것과 외식(外食)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과거 교회의 목사님들이 부흥회를 외식하는 것에 비유하고 교회에서 듣는 설교를 집에서 엄마가 해 주는 밥에다가 비유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집에서 해 주는 밥이 기본이지요. 가끔씩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먹는 것은 맛이 있지만, 두 끼만 연속해서 먹어도 속이 메슥거립니다. 성경이, 그리고 그 성경을 충실히 해석하는 개혁주의가 우리의 건강을 유지해 줍니다. 어린아이들 생각에는 매일 매 끼 자장면 먹으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엄마의 요리솜씨를 원망하지요. 가끔씩 부흥회하고 가끔씩 밖에 나가서 은혜 받는 것이 신앙을 풍요롭게 합니다. 물론 이 때에도 주의해야 합니다. 집에서 엄마가 해 주는 밥에는 못 먹을 것이 없지만, 외식할 때 식당에서 어떤 재료를 쓰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장 딱한 것은 자기의 건강을 유지해 주는 것이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인 것을 모르고, 외식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 줄 아는 현상입니다. 이런 것들을 따라가다가 필경 건강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은? - 시원(始原)의 언어

다시 방언으로 돌아갑시다. 방금 방언에 관한 옥성호와 그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많은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 핵심 가운데 사도행전의 방언과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모두 외국어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옥성호의 논리에 약간 무리가 있습니다. 그는 우선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마찬가지로 외국어 방언이라고 하였습니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pp. 109-114) 당시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랄랄라’ 방언 (편의상 이렇게 이름 붙이지요.)을 하는 사제들과 엄격히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도구로서의 방언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책 조금 뒤에 고린도전서 14장을 해석하는 부분에 가서는 이들이 말하는 방언이 랄랄라 방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논의를 진행시킵니다. 즉 옥성호는 이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고전14:2)이라는 방언에 대한 말이 방언의 정의가 아니라 비꼬는 말이라고 하지요. “고린도교회의 사람들아, 너희가 랄랄라 방언을 말하면서 이를 하늘의 언어라고 하는데, 도대체 영으로 말한다는 말이 뭐냐? 나는 영으로 말하고 지성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너희의 해괴한 논리를 따라가기 어렵구나!” 라고 바울이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pp. 166-177) 그런데 옥성호가 이렇게 말할 때는 당시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랄랄라 방언을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즉 앞에서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한 방언이 질 높은 외국어 방언이라고 하였다가, 14:2을 해석할 때는 수준 낮은 랄랄라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 견해를 말씀 드리면, 고전14장에서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말하던 방언은 오늘날의 방언기도에 해당하는 랄랄라 방언이었습니다. 그리고 14:2의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은 방언의 정의(定義)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여기서의 ‘비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숨겨진 죄라든지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든지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14절의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 하신 말씀은 글자 그대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의 효능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몇 가지의 반론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우선 고전14:14절의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spirit)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mind)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 하신 말씀의 해석과 관계된 것입니다. 일단 이 말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소위 ‘이분설’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인간론에서 다루지요. 인간론의 아주 오랜 논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분설과 삼분설 그리고 단일론 중 어느 것이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두 가지 요소(elements)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이분설이고, 영․혼․육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이 삼분설입니다. 영혼과 육체의 구별도 없이 그저 사람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단일론이고요. 어느 이론이 성경적인가를 논의하는 것은 매우 긴 이야기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조직신학 책을 뒤져보시면 될 것입니다. 개혁주의 입장은 오래 전부터 영혼과 육체의 이분설이었습니다. 물론 이 땅에 있을 동안에는 영혼과 육체가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요. 또한 영혼은 고상하고 육체는 저열하다는 생각도 전혀 성경적이 아닙니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육체와 혼과 영의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혼(psyche)은 의지와 감정의 영역이며 자연적인 사람의 생명이고,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하나님의 신적 형상의 본질이고 하나님을 아는 능력이며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라고 이 둘을 구분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오직 우리의 영을 통하여 알려지고 예배되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중생이란 타락한 영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다시 하늘에 속한 성질이 나타나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삼분설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서 혼과 영이 모두 사람의 정신적인 작용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구절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노래 가운데 “내 영혼(soul)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영, spirit)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이라고 합니다. (눅1:46-47) 영혼과 영이 병행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지요.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이해할만합니다. 우리의 몸 뿐 아니라 우리의 혼, 혹은 정신도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혼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대조시킴으로써 현대 교회의 물질주의적, 율법주의적, 관료주의적 행태를 비판하고, 영적이고, 은혜에 의한, 자유로운 신앙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적인 활동을 혼에 속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신앙이 지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타락한 지성의 영향을 받지 않는 어떤 인간의 내밀한 요소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교통하는 데 바로 방언이 가장 좋은 통로가 된다고 합니다.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비밀스런 교통을 체험하고 그것을 통하여 지성적인 기도가 줄 수 없는 능력을 받게 된다는 것이 방언파의 주장입니다. 방언파는 필연적으로 삼분설을 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언파의 주장을 가장 강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고전14:14의 “나의 영이 기도한다”는 구절입니다. 영(spirit)이 기도하기 때문에 영에 유익이 되지만, 마음(지성, mind)으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열매를 맺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어려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개혁주의자로서 이분설이 성경적이라고 하였는데, 고전14:14은 방언을 정당화하는 삼분설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간을 말할 때는 단일한 인간이지만 (이 땅에서는 심지어 영혼과 육체도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 이야기 기억하시지요?) 이 단일한 인간을 묘사하기 위하여 여러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네 마음(heart)을 다하며 목숨(soul)을 다하며 힘(strength)을 다하며 뜻(mind)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눅10:27)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에 근거하여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의 네 가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단일한 인간인데 그 인간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여러 가지 퍼스펙티브(perspectives)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elements)가 여러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23에서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흠 없이 보존되기를” 원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 의미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이분설이 맞지만, 혼과 영을 대조시키고 있는 본문은 그 본문의 의미가 있으니 이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이분설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삼분설처럼 보이는 본문들을 소홀히 다루면 안 됩니다.) 혼과 영을 대조시키는 대표적인 본문이 바로 고전14:14입니다. 즉 이 본문 하나를 가지고 삼분설이 맞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의 영의 교제를 이야기할 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으니 이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성경을 전체로 보면서도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의미 있게 보아야 합니다. 옥성호가 말하는 대로 이 말씀이 사도바울이 영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비꼬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흥, 영으로 기도한다고? 도대체 영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내 지성이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영으로 기도한다는 말이냐?” 라는 식은 아닙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영적인 면(perspective)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방식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김우현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으로 기도하는 것은 ‘깊은’ 교제이고, 우리의 말로 기도하는 것은 얕은 기도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문맥에 맞지 않지요. 고린도전서14장 전체의 문맥은 “영으로 기도”하는 방언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개인의 유익을 위하여 필요할 수 있지만, 지성적으로 깨달은 말이 공동체를 위하여 더욱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14장 말씀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알아듣기 쉬운 말이 아닌 방언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요 (9절), 그런 말하는 자는 “야만인” 같고 (11절), 교회에는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라 합니다. (12절)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9절) 여기 “깨달은 마음으로 말하는 것” (words with my understanding)이 중요합니다. 방언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삼분설을 주장하면서 영의 세계가 깨닫는 지식의 세계보다 더 고상한 차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방언에 대하여 가르치는 거의 유일한 성경인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그 내밀한 영의 대화보다는 깨달은 마음(mind 혹은 understanding)을 더 중요한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방언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하지 말까요? 고전14:15이 답을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spirit)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mind)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어렵지 않지요? 성경의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 따라 가면 됩니다.

그런데 도대체 ‘방언’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비밀한 영의 대화, 뭐 이런 거 말고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할 수 없을까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형들에게 돈을 뺏기고 한 대 쥐어 맞고 들어왔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엄마의 품에 안겨서 ‘왕〜’ 웁니다. 엄마는 영문을 몰랐지만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그를 꼭 끌어안아 주었습니다. 저는 방언이 마치 이와 같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사는 것 참 피곤합니다. 그 피곤 중에 말하는 것만큼 피곤한 것도 없습니다. 물론 여자분들은 말하기를 즐겨한다고 합디다만.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오해나 하지 않을지, 이 말을 듣고 잘못 전하여 뒤통수를 치지나 않을지...... 또 말을 듣는 것도 피곤합니다. 별 의미도 없는 말을 계속 들어야 하지요, 어떤 때는 남의 욕 하는 말, 고압적인 말, 형식적인 말 등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를 보게 됩니다. 그런 피곤함 때문에 지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 중 나아왔습니다. 울면서 하소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도 격식을 갖추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때 내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언어가 튀어나옵니다. 단순한 어절의 반복입니다. 언어라고 하기에는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시원(始原)의 언어라고나 할까요, 내가 어렸을 적 말 배울 때 그저 어른들 앞에서 따라하던 말 같기도 하고, 그 때 내 말을 들은 엄마 아빠는 좋아라 칭찬을 많이 해 주셨는데. 하나님 앞에서 조리 있는 말로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을 이렇게 가슴으로 내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를 들어주시고 내 맘을 평안케 해 주셨습니다. 왠지 모를 힘이 불끈 솟고 용기가 차오릅니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겠지요. 그렇다면 방언을 반드시 ‘성령의 은사’라고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한 행태는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아니, 종교를 안 가진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록밴드의 콘서트에 가서 저 혼자 소리를 질러대는 것도 방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바로 옥성호가 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왜 이전부터 사교집단에서 사용하던 방식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을 전달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많이 발견되는 방언이 기독교에서 안 나타나는 것이 더 차별화하는 전략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pp. 219-221)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사는 원래 불신자나 다른 종교인들이 사용하는 것들에(개혁주의에서는 이를 ‘일반은총’(Common Grace)라고 부릅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원래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좋은 방법이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타락시켰다고 말해도 됩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에 나타나는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들을 봅시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 역시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이방종교에도 나타나는 은사들입니다. 예언도 마찬가지이지요. 예언자의 신탁(神託)이 없는 종교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유의 은사도 그렇습니다. 병원에 가서 고칠 수 있는 것이고, 증산교에 가도 신유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령님도 치료하십니다. 치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실 뿐입니다.
방언과 유사한 ‘언어’를 말하자면, 음악을 들 수 있습니다. 음악도 이미 많은 종교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고 신과의 합일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도구입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는 인간의 심장박동을 가속화하여 흥분의 상태로 몰아넣습니다. 가는 바이올린 소리는 우리의 심금(心琴, 마음의 현악기)을 울리고, 굵은 첼로의 선율에는 어딘지 모를 슬픔이 잠겨 있습니다. 으뜸화음으로 진행되다가 4도 화음으로 바뀌면 평안을 느끼게 되고, 단조(短調)에서 장조(長調)로 옮겨가면 밝은 마음이 됩니다. 음악이 가지는 이런 일반적인 특성을 기독교에서 차용한다 해서 이를 신비주의 사교집단에 동조하는 것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음악도 언어입니다. 이를 분절하여 각 음절의 의미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있는 언어입니다. (미술이나 음악이 언어라고 하는 생각은, 박이문, 『예술철학』 (서울: 문학과지성, 2006)에서 빌려 왔습니다.)

방언은 의미 있는 말인가?

방언을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과연 방언이라는 언어가 의미(meaning)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맞고 돌아와서 부모에게 안겨서 터뜨리는 울음과 같은 것이라면, 이 세상의 삶과 말에 지친 사람이 영적인 부모인 하나님께 안겨 웅얼거리는 시원(始原)의 언어라면, 그 언어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방언에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반(反)방언파에 큰 힘을 실어주는 것이 됩니다. 반방언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참 쉽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외국어로 된 것으로서 외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고린도교회의 방언도 외국어 방언이라 합니다. 당연히 외국어이니 통역을 붙이든지, 아니면 방언 통역의 은사를 받으면 해석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방언파는 곤란을 겪습니다. 의미가 없는, 시원의 언어라고 말하면, 방언을 통역하라고 하는 고전 14장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가 됩니다. 반대로 의미가 있다고 말하려니 자신들이 말하는 방언의 정의와 배치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실제로도 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방언하는 사람들과 인터뷰를 해 보니까 입에서 나가는 어절(語節)은 꼭 같은데, 자기 마음에서 기도하는 내용은 영 달랐다고 합니다. 방언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도 그 어절을 대략 분석해 보면, 그 단어(?)의 숫자가 수십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수백 개의 단어를 사용해서 합니다. 또 옥성호가 든 예 가운데도 있는데요, 한 사람의 방언을 녹음하였다가, 통역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통역이 다 각각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방언이 의미 있는 어절인가 하는 데는 의심이 갑니다. 그러면 의미도 없는 말을 통역하라고 하였을까요?

또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의미가 있는 말과 없는 말을 그렇게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 이거 언어의 본질과 관계된 질문으로 넘어가는군요.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의미가 있는 말과 의미 없는 말을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의미가 있는 말의 시초가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달려들면서 우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 자연을 보고 우와〜 하고 탄성을 내는 것, 아픈 신음소리 등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들이 기초가 되어서 의미 있는 말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말들이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언어의 기능이 사물을 묘사하는 것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있다고 할 때, 이러한 감탄어의 기능이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서편제라는 영화 보셨지요? 한(恨) 맺힌 소리를 위하여 눈이 먼 오정해와 그의 이복오빠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떠돌던 오정해가 소리를 하고 오빠가 북채를 잡았습니다. 신명나는 노래를 하고 북을 쳤습니다. 이 둘 사이에 만감이 교차하고,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미 있는(meaningful)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서편제의 원작은 이청준이 쓴 연작소설인데, 그 소설의 부제가 “언어사회학 서설”(序說)입니다. 이청준의 생각에는 진정으로 의미 있는 언어라는 것은 그 의미의 정확성을 기하는 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바로 의미에 상관없이 전달되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감탄어가 의미가 없는 말은 아닙니다. 모든 언어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면전에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자신을 내려놓는 방언은 이를 분절시켜 어디가 주어고 어디가 동사인지를 나눌 수는 없지만, 분명 의미를 가진 언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방언을 통역하라고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께서 한 사람의 깊은 신음과 찬양을 이해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그 의미를 풀어서 해석하도록 하시는 것이 통역의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방언을 너무 강조하지 말라

방언기도가 모종의 유익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너무 강조하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방언기도의 유익에 대하여는 김우현감독의 책을, 이를 경계하는 내용에 대하여는 옥성호의 책을 보면 다 나와 있고요. 저는 방언에 대하여 호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습니다. 공평하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방언에 대하여 말하는 성경이 얼마나 될까요? 단지 ‘외국어’라는 뜻으로 ‘방언’이라는 단어가 나타난 곳은 신구약에 수십 군데에 이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은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2-14장 외에는 없습니다. 그나마 사도행전 2장은 특수한 외국어 방언입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2-14장 외에는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매우 조심스럽게 한편으로는 자제시키는 분위기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영적인 손실을 보았다든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가 방언을 말하지 못하여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지지 못하였다든지, 예수님이 방언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지성소에 직통으로 들어가지 못하였다든지...... 이런 내용이 성경에 없습니다. 방언을 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좋은 것인데, 이 정도의 비중만을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한 번 (많이 해 봐야 두서너 번) 나오는 방언을 우리 영적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물론 방언을 통하여 처음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를 크게 부각시키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무리한 일반화가 되면 안 될 것입니다.

1906년 미국 캘리포니아 아주사거리의 부흥운동 이후 방언운동이 복음주의 부흥회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고, 우리나라의 오순절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또 최근에 방언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기에 몇 마디 써 보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방언운동은 부흥운동의 일부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조나단 에드워즈나 찰스 피니 이후 여러 가지 형태의 부흥운동이 미국에서 왕성하게 일어나 한국에 들어왔고, 또한 이에 상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비롯하여 부흥운동에 어느 정도 비판적인 신학도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방언운동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입장은 찰스 피니와 찰스 하지의 견해차에 대한 저의 입장과 대동소이합니다. 부흥운동을 이해하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비판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를 통한 대속이라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손상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대의(大義)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큰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 말하는 작은 부분에까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방언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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