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에 관하여

작성자
장동민
작성일
2018-08-11 11:03
조회
1971
기적(奇蹟)에 관하여

기적과 관련된 두 가지 질문

논의를 시작하기 위하여 ‘기적’을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신적 존재의 일하심”이라고 우선 정의하자. 사람들이 ‘기적’(miracle)에 대하여 논의할 때,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질문을 가지고 있다.
첫째, 도대체 기적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기적의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자연주의자’라 부르도록 하자. 이들은 자연법칙(natural law)이 확고부동하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거스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과거 과학이 발달하지 못하였을 때 자연과 인간에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기적’이라고 불렀을 것이라 한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과거에 설명할 수 없던 것들을 합리적으로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앞으로 과학이 더 발달하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연주의자 가운데 극단적인 사람들은 인간의 사고(思考)와 행동도 모두 과학의 법칙으로 설명하려 한다. 한 사람의 행동을 과거 사건의 영향, 사회적 법칙, 유전인자 등으로 설명해 버리려는(explain away) 것이다. 하지만 기적을 부인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 종교나 인문학의 자리를 남겨두는 사람도 많다. 자연의 영역과 윤리(혹은 종교)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는 이신론(理神論, deism), 과학과 수학법칙이 지배하는 ‘현상계’와 이를 뛰어넘는 ‘물(物) 자체’의 세계를 구분하려는 칸트주의, 진화론과 과학을 인정하면서 종교의 자리를 ‘절대의존의 감정’에 놓으려는 구(舊)자유주의 신학, 계시의 사건은 이 세상의 역사(Historie) 속에 어떤 외연도 가지고 있지 않는 원역사(原歷史, Urgeschichte)라고 말한 칼 바르트와 그 이후의 현대신학 등이, 두 영역을 구분함으로써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면서도 신앙의 영역을 남겨두려는 이론들이다. 도대체 오늘의 지성인 가운데 진지하게 하나님의 기적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도 실제의 삶에서는 기적을 별로 믿지 않는 듯싶다. 이들은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동정녀 탄생과 부활 등이 담긴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하지만 병에 걸리면 우선 병원을 찾고, 보험을 들고, 좋은 의사를 수소문하고, 그래도 안 되면 민간요법에 기대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으로 기도원을 찾는다. 이때도 진지한 믿음을 가진다기보다는, 어차피 낫지 못할 병이라면 기도라도 하다가 죽자는 마음으로 갈 것이다. 이는 자연주의자가 학문의 세계를 비롯한 모든 공적(公的)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강단에서는 기적을 고백하고 설교하지만, 교회 문을 나서면 곧바로 자연법칙이 지배한다고 믿게 만드는 세상이다. 자연주의자가 공교육(公敎育)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만든 국가 교과과정으로 12년 동안 교육을 받고 나면, 대다수의 신자들은 기적을 바라지 않게 된다.

둘째, 성경에 기록된 기적은 인정하지만 그 기적들이 오늘날도 계속되는가? 전통적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실제로는 어떨지 몰라도 이론적으로는) 기적을 믿는다. 한 세기 전 초기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이 이미 잘 설명하였던 것처럼, 성경이 기적의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기적의 기록을 제외한다면 더 이상 믿을 것이 남지 않게 된다. 기적의 시작은 천지창조이고 예수님의 성육신, 기적 치유, 부활, 재림 등의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가 모두 자연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성경시대에 일어났던 기적들이 지금도 일어나는가에 대하여는 의견이 나뉜다. 열심 있는 성도와 목회자들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에 기적이 일어났다면 지금도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믿는 자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을 말하고,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않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어 병을 낫게 할 것이라는 약속(막16:17-18)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던 일 뿐 아니라 이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라고 하였으니(요14:12) 예수님이 일으킨 기적보다 더 큰 기적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신학자들 가운데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한 기적이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기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쳤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기적은 반드시 계시와 연결되어 있다. 기적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입증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모든 표적을 보여 주신 이유가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하고 있다.(마12:28; 요11:42; 요20:30-31) 그런데 만일 지금도 기적이 일어난다면 이는 지금도 계시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계시의 정점(頂點)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구원의 완성이고, 하나님은 그 계시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 주기 위하여 기적을 동반 시키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단회적(單會的)인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기록인 성경의 계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경우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결국 그가 전하는 메시지와 기적을 결부시키기 마련이다. 자신이 일으키는 기적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증거가 되고 결국 그가 하는 말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한다. 물론 모든 병 고치는 사람이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의 말을 더 믿게 하려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글자로 쓰인 책이지만, 기적을 일으키고 병을 고치는 사람의 말은 훨씬 더 생생하고 힘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세상에는 기독교인 외에도 기적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기적을 보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컨대 성모상(像)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다든가, 불상(佛像)에 절하여 아이를 얻었다든가 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그렇다면 가톨릭이나 불교의 진리도 모두 옳다고 해야 하는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의 하지(Charles Hodge)는 당시 유행하던 피니(Charles Finney)를 비판하였다. 피니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와 기적을 추구하다가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Charles Hodge, "Finney's Lectures on Theology," in The Princeton Theology, 1812-1921: Scripture, Science and Theological Method from Archibald Alexander to Benjamin Warfield, Ed. by Mark Noll, Grand Rapids: Baker, 1983, p. 167
역시 프린스턴의 워필드(B. B. Warfield)도 하나님은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의 시대에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하여 자신의 일을 확립하셨고, 성경의 완성 이후에는 초자연성을 나타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연적인 방법을 가지고 일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따지고 들어가 보면, 가짜 아니면 자연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들이라고 한다. 워필드는 기적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경우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이 완성된 지금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이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말한다. 워필드, 이길상 역, 『기독교 기적론』 (서울: 나침반, 1993)을 참고하시오.

성경의 ‘이적과 기사’

기적과 관련된 두 가지의 중요한 문제 해결을 위하여 먼저 성경에서 ‘기적’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기적’이라는 한국어 단어는 개역성경에서는 단 세 구절에 등장하고(시40:5, 사20:3, 살후2:9 등), 개역개정에서는 12회 등장한다. 그런데 이 단어들의 영어 번역은 거의 일관되게 ‘wonder(s)’나 ‘wonderful works’이다. ‘기적’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는 '모페트'인데, 우리말 성경에 ‘이적,’ ‘기사’(奇事), ‘이상함’, ‘표적’, ‘예조’, ‘징조’ 등 여러 단어로 번역되고 있다. 모페트와 가장 많이 함께 사용되는 단어는 히브리어 '오트'로서 역시 ‘징조,’ ‘표’(表), ‘표징’, ‘증거’, ‘기’(旗)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두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세메이온'과 '테라스'이다.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이적과 기사”라는 어구가 바로 “‘오트’와 ‘모페트’”의 번역이다. 이 둘의 뜻을 합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한 징조를 삼으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앞의 개혁주의자들이 기적과 하나님의 계시를 연결시킨 것은 바른 지적이다.) 예컨대 애굽의 바로왕에게 보인 열 가지 재앙이나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원하신 것이 이적과 기사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임을 가르쳐 주신다. 때로는 거짓 선지자가 이적과 기사를 일으켜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게도 할 것이다.(신13:1, 막13:22 등)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은 성경의 이적과 기사가 반드시 자연법칙을 어기면서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초자연적 기적의 가능성에 대하여 필자의 주장과 비슷한 논지를 가진 저자는 C. S. 루이스이다. (루이스, 이종태 역, 『기적: 예비적 연구』(서울: 홍성사, 2008)을 참고하라.)
예컨대 열 가지 재앙의 경우, 나일강이 피가 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연법칙으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개구리나 메뚜기가 많아지는 것이나, 전염병이 돌아 가축이 죽는 것이나, 일식(日蝕)으로 날이 어두워진 것이나, 심지어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은 것은 모두 자연법칙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 아침마다 만나가 내린 것은 자연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메추라기가 몰려온 것은 설명이 가능하다.
‘이적’ 혹은 ‘기사’에 해당하는 원어의 단어가 ‘징조’, ‘예표’, ‘표적’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성경의 이적과 기사가 반드시 자연법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진다. 예컨대 이사야가 아들 둘을 낳은 것이 이스라엘에게 ‘징조와 예표’가 되었는데(사8:18) 이때의 ‘징조와 예표’도 ‘오트’와 ‘모페트’의 번역이다.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처럼 끌려가는 퍼포먼스나, 그의 아내가 갑자기 죽는 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징조’ 혹은 ‘표징’(‘모페트’)이다.(겔12:6; 24:24)
사실상 성경이 쓰여 진 시대는 ‘자연법칙’(natural law)이라는 단어도 없었고 사상도 없었다. 그러니 ‘기적’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자연법칙을 거스른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으리라. 성경의 ‘기적’은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어서 표징으로 보여 주시는 일이라는 뜻의 ‘이적’, ‘기사’, ‘표징’ 등과 동의어였던 것이다. 오늘날 기적에 관하여 논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 카테고리를 가지고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이후 서구의 계몽사상과 과학혁명이 기독교세계에 준 영향은 넓고 그 상처는 깊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단지 살기 편하게 만들어 준 것뿐 아니라 사회구조와 사고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자연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숨결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파악과 개발의 대상이 되었다.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자연에서 목적인(目的因)인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낳고 기르는 거대한 질서에 압도되었다. 급기야 자연에서 발견한 법칙으로 인간의 사회와 심리 그리고 종교까지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객관성(objectivity)은 절대성(absoluteness)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자연주의자들은 진화론과 성경의 고등비평을 앞세워 기독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여, 기독교 지성인과 신학자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여야 하였다. 어떤 이들은 자연법칙으로부터 하나님을 수호하기 위하여, 창조하였으나 다스리지 않는 하나님을 말하였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다스리는 영역에서 질료의 영역을 제외시켰다. 기독교의 붕괴를 우려한 우리의 근본주의자들은 초자연적인(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기적의 가능성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웠다. 성경의 충족성을 믿으면서도 과학에도 정통한(혹은 과학의 발달에 압도된) 찰스 하지나 워필드 같은 개혁주의자들은 성경과 과학을 조화롭게 설명하고자 학문적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런 모든 노력의 공통의 대전제는 과학법칙의 불변성과 객관성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근대인(modernists)이 전제로 하고 있는 자연법칙과 과학의 전제들 이전에 쓰여 졌기 때문에, ‘이적과 기사’가 자연법칙을 어기는지 어기지 않는지에 대하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이적과 기사’의 정의가 무엇인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이적과 기사’가 나타났다고 말하는가? 하나님께서는 항상 세상을 주관하고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한번 창조하시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고 계신다. 시104편 전체가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와 섭리를 말하지만, 특히 30절을 보라.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항상 보이는 것은 아니다. (Deus absconditus,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45:15) 그러다가 구속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아니면 하나님 백성의 존속이 위태로운 죄악과 절망의 때에, 스스로를 나타내셔서 당신의 뜻을 알리기 원하신다. 이 때 우리 인간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큰일을 하시는데 바로 이를 가리켜 ‘이적과 기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절대적 인격이신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자연법칙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과 자연법칙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영을 보내어 만물을 매일 새롭게 창조하시고,(시104:30) 해와 달과 별들을 운행하시고,(시19:6) 비와 눈과 우박을 그 곳간에서 내어 오시고,(욥38:22; 시105:32) 모든 생물에 호흡을 불어넣기도 하시고 거두기도 하시며,(사42:5; 행17:25; 시104:29) 들의 꽃을 입히시고 공중의 새를 먹이시며,(마6:26,28) 인생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마10:30)이라고 증언한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보고 있는 것은 정해진 자연법칙에 의하여 돌아가는 천체와 아무런 목적이 없이 움직이고 있는 자연을 본다. 모든 생물은 정해진 호흡과 영양과 생식의 원리에 따라 나고 죽으며, 사람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붙드시고 생명과 호흡을 주신다는 말은 시적(詩的)인 표현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만드시고 그 법칙대로 세상이 운행되도록 하시다가, 때로 중요하고 긴급한 순간에 신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여서 개입하시는 기계장치에 의한 신(Deus ex machina)인가?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룰을 스스로 깨뜨리시며 우리의 삶에 등장하는 분인가? 도대체 목적 없는 객관적 법칙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과(노자 도덕경의 ‘天地不仁,’ 천지는 어질지 않다.),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연결점을 가지는 것일까?

우선 잠시 생각해 볼 것은 자연법칙과 인격의 관계이다. 사람은 자연 속에 살면서 자연의 지배를 받고 그 가운데 살지만 또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다. 중력 법칙에 따라 눈꺼풀은 내려가고 몸은 눕고 싶다. 하지만 깨어 있는 동안 의지를 사용하여 차렷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기도 한다. 관성의 법칙에 의하여 가만히 서 있는 것이 편하지만, 힘을 들여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가만 놓아두면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늙고 기력이 쇠하지만, 열심히 운동을 하고 약물을 써서 노화를 방지한다. 인간의 이런 행동이 자연법칙을 어기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자연법칙은 의지를 가진 인간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고, 인격인 인간은 그 안에서 매일 자유롭게 활동하고 사고한다.
인격이신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도 이와 유사하다. 자연법칙에 매여서 일하다가 중요한 때 가끔씩 자연법칙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늘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이를 사용하시고, 어떠한 충돌이나 모순이 없이 이를 운행하는 분이면서도, 자연법칙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6)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인격인데 차이점도 있다. 사람은 주어진 자연법칙 안에서 활동하지만, 절대적 인격(The Absolute Person)인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만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자연법칙을 넘어서 일하신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수술도 하지 않았는데 기도를 열심히 하였더니 암세포 덩어리가 제거되어 빠져나왔다고 하자. 기적 중의 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어긴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암세포 덩어리가 뭉치고 절단되도록 하여 빠져 나오도록 자연법칙을 사용하신 것뿐이다. 바다가 갈라진 것이 놀라운 기적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닷길을 내기 위하여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출14:21) 하셨다. 우리가 아는 자연법칙 위에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더 큰 자연법칙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것이다. 이런 일을 사람들이 보게 될 때, 이를 ‘이적과 기사’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인격이신 하나님이 이렇게 늘 자연 안에서 마음대로 활동하신다면 세상은 온통 놀랍고 신기한 일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데, 왜 우리는 하나님이 가끔씩 밖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기사와 이적을 잘 보지 못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패턴이 자연의 법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질서가 나타나도록 세상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의 일하심은 일정하시다. 아침마다 해가 뜨고 바닷물이 한계를 넘지 않는다.(렘5:22) 모든 자연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분이 인격이신 하나님이신데, 신실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살기에 편하도록 자연을 만드셨고 그것이 법칙처럼 보이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경험 속에서 계속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한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그저 자신이 아는 한도 안에서, 늘 관찰되는 일일 경우에는 ‘자연법칙’이라 말하고, 그것을 벗어나서 설명을 할 수 없으면 ‘기적’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놀라운 일이 항상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는데, 처음에는, 엄마, 아빠, 맘마로부터 시작한다. 만 두 살이 되면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를 연결시켜서 말을 한다. 한 단어를 지칭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것을 보면, 정말 어디에서 이런 능력이 나왔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모든 아이가 다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당연한 자연의 법칙처럼 생각하는데 정말 자연히 이루어진 것일까?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알지만 어떻게 이 모든 일들이 당연한 것이란 말인가?

기적과 계시

맨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두 가지 질문 가운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였다. 기적은 존재하는가? 그렇다. 존재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 세상이 기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간간히 나타나는 신적인 개입을 가리키는 (근대 과학혁명 이후에 의미를 지니게 된) ‘기적’(miracle)이라는 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세상 가운데서 일하신다. 물론 그런 하나님의 일 가운데 인간의 생각을 초월할 정도의 큰일도 있어 이를 ‘이적과 기사’라고 성경이 부르고 있다.
둘째 질문은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과 사도들이 기적(이적과 기사)을 일으켰다면, 성경이 완성된 후인 오늘날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기적과 계시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이 완성된 오늘날을 기적이 일어날 필요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는 논지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첫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충분히 이해하였다면 둘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쉽게 도출된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도 하나님이 천지를 운행하고 만물에 호흡을 주시는 분이었다면 당연히 성경이 완성된 후에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일하신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도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신 분이라면 당연히 성경이 완성된 후에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일하신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오늘날도 그런 이적과 기사에 따르는 계시가 주어지는가? 물론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말씀의 해석과 설교를 통하여,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성령이 감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당신의 뜻을 전하신다. ‘계시’(revelation)라는 말이 부담스러운 신학자들은 이미 쓰여 진 성경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illumination)하신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계시’와 ‘조명’이라는 두 은유(metaphor)가 어원상 어떤 본질적 차이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전통적인 개혁신학자들이 지키려고 하였던 것은 이해할 만한 것이고 또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즉 역사상 나타난 가장 위대한 사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손상을 받을까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록된 성경을 ‘계시’라 부르고 이를 해석하려는 후대의 모든 노력을 성령의 ‘조명’으로 가능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리라. 옳다. 하나님이 하신 일 가운데 가장 큰 일, 가장 위대한 이적과 기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일이고, 이를 기록하고 해석한 성경이 모든 계시의 완성이다.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이적과 기사와 이에 따르는 넓은 의미의 ‘계시’ 혹은 ‘조명’ 혹은 ‘하나님의 말씀’은, 이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기록인 성경의 잣대(canon)에 맞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도 펄펄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그 엄격한 잣대 때문에 생기를 잃게 되면 안 될 것이다. 그 잣대가 성경의 잣대가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정황에서 성경을 재구성한 도그마일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더욱이 어떤 신학자나 교회정치가의 손에 그 잣대가 들려져 상대를 억압하고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면...

성경은 방대하고, 해석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해석이 옳다 하고, 성령의 조명하심은 손으로 붙잡기 어려운데,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난다면, 어떻게 판단하고 무엇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이와 같은 짐은 오늘날 우리만 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은 의무를 지고 있었다. 미래를 맞추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들이 나타나서 ‘이적과 기사’(‘오트’와 ‘모페트’)를 보이면서 자기를 따르라고 할 때(신13:1-3), 이를 판단하여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바로왕의 술객들도 모세가 행한 몇 가지 이적을 행하여 왕의 마음을 흔들었다. 구약 예언자들의 가장 큰 과업 가운데 하나는 거짓 예언자들과 대항하여 그들의 거짓됨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신약시대에도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이적과 기사’(‘세메이온’과 ‘테라스,’ 막13;22)를 행하면서 택한 백성들까지도 미혹할 것이며,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이적’(‘세메이온’)을 행하여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계13:13)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셔서 오늘날도 횡행하는 이적과 기사들에 현혹되어 우리를 구원할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거역하고 넘어서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하여서도 이적과 권능이 나타나도록 하셔서, 당신이 살아서 일하시는 하나님이며,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진리임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셔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인생 가운데 신비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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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 홍인규교수와의 대담
장동민 | 2018.08.11 | 추천 0 | 조회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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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에 관하여
장동민 | 2018.08.11 | 추천 1 | 조회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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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과 골방
장동민 | 2018.08.11 | 추천 0 | 조회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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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과 부정: 아이를 낳은 산모는 왜 부정한 것일까?
장동민 | 2018.08.11 | 추천 5 | 조회 2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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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 새로운 선교 전략을 위한 제언
장동민 | 2018.08.10 | 추천 1 | 조회 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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