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 한국 장로교 분열의 역사

장동민(백석대학교 역사신학)

교단 통합을 위하여
교단 통합의 시즌이 온 것일까? 그 동안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던 한국교회에 통합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05년 예장 합동측과 개혁측이 26년 만에 통합한 것을 필두로 여러 장로교 교단들이 연합을 위하여 물밑 작업을 진행 중이다. 2015년 9월 총회에서는 예장 고신총회와 고려총회가 39년 만에 다시 하나가 될 것이고, 예장 대신과 백석이 통합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몇 년 전 분열되었던 보수적 교회의 연합단체인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과 한교련(한국교회연합)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임원들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반가운 소식이면서도 이런 의문이 든다. 왜 지금 여기저기서 교단 통합이 주요 의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교단의 통합은 바람직한 것일까? 또한 과연 교단 간의 통합이 가능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교단의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선 교회 분열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통합은 대체로 분열의 역순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분열의 원인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피상적으로 통합을 선언하다가는, 물리적 통합 이후에도 화학적으로 하나 되기 어렵고 심지어 재분열의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의 원인들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조명해 보려 한다. 왜 분열이 일어났는지를 비판하거나 정죄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통합에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뿐이다.

우선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교회의 분열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매우 복잡한 여러 가지 원인들이 서로 뒤얽혀 있다. 분열을 설명하기 위하여 몇 가지 카테고리를 설정해 보고자 한다.

① 교단의 분열은 신학적인 요인과 사회학적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일반적으로 장로교회는 교리와 신학에 대하여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 차이로만 분열을 설명하려는 경우가 많다. 1953년의 예장과 기장의 분열이 성경관을 둘러싼 신학적 자유주의 때문이고,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이 WCC 문제 때문이라는 등이다. 그러나 교회는 신앙과 신학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적인 기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가주의나 인종적 편견이나 경제적 이해관계, 권력과 명예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회적 기관이기도 하다. 종교와 사회제도, 영적인 것과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문제들이 서로 얽혀있는데, 분열이라고 하는 큰 사건에서는 이런 것들이 또렷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② 분열은 긴 갈등의 끝에 나온 것이고, 반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예컨대 장로교의 경우 1934년대 성경관을 둘러싼 논쟁이 1953년의 분열로 끝을 본 것이다. 감리교의 경우 1954년의 분열은 1946년 재건파와 복흥파 분열의 연장이고, 다시 1974년 분열로 이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때로는 외국에서 시작된 갈등이 국내로 옮겨 붙은 경우도 많다. 분열은 축적되어 있던 갈등들이 큰 에너지와 더불어 폭발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분열을 연구할 때는 반드시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하는 역사를 알아야 한다. 70년대 이후 분열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하여 이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가 많다는 말이다.

③ 또한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다룰 때는 직접적인 원인도 있지만 간접적으로 배경이 되는 원인(遠因)도 있다. 교단의 분열을 연구할 때도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나무와 더불어 더 넓은 사회적 배경의 숲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도구들을 가지고 70년대 이후 장로교 교단들의 분열의 원인을 간략히 서술하려 한다. 크게 둘로 나누어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들을 먼저 살피고, 또한 분열의 배경을 이야기하려 한다.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 신학적 차이
모든 분열을 사회학적 요인들에만 돌리는 ‘사회학적 환원주의’는 사태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교회는 신앙과 이념을 중심으로 뭉친 결사체이기 때문에 신학이나 이념에 대한 헌신도가 대단히 크다. 이 요인을 배제하고 분열을 설명할 수 없고, 또한 이를 배제한 통합운동은 결국 반발을 불러일으켜 또 다른 분열로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신학적 요인만 가지고 교회의 역동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미국 신학자 리차드 니이버(Richard Niebuhr)의 『교회 분열의 사회적 배경』이 나온 후 교회의 분열을 신학적 요인으로만 설명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컨대 1953년예장-기장의 분열은 성경관 논쟁 뿐 아니라, 서북-영남의 교권세력과 관북-기호-호남의 비(非)교권 세력의 다툼에 기인한 것이다. 1959년의 합동-통합 분열도 WCC라는 신학적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으나, 좀 더 들여다보면 미국의 구호물자 배분을 둘러싼 평안도 출신 목회자와 황해도 출신 간의 반목의 골이 깊었다.

1970년대 이후의 교단의 분열들도 신학적 차이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1979년 ‘청담측’이 합동측에서 분열된 사건이다. 한국 보수신학의 태두라 할 수 있는 박형룡과 그를 따르는 목회자들이 합동측 총회신학교 교수들이 소위 ‘신복음주의’를 받아들여, ‘좌경’(左傾)되었다는 이유로 총회에서 논쟁하다가 결국 갈라섰다. 당시 총회신학교와 총회의 다수파를 ‘주류’라 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좀 더 보수적인 세력을 ‘비주류’라 불렀다. ‘비주류’는 ‘개혁 측’으로 발전하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였고, 26년이 지난 2005년 예장 합동측과 통합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1970년도 이후의 분열에서 신학적 차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0년대 분열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이전 분열들에도 사회학적인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었지만, 1970년대 이후의 분열은 신학 외적인 문제들이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향을 보인다. 1979년의 ‘비주류’ 분열의 경우도 신학교 교장 직을 둘러싼 투쟁과 총회에서의 교권 다툼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부분의 분열들이 신학적 순결성을 내세우고, 신학적 선언문과 함께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지만, 분열에서 신학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훨씬 덜해졌다.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 신학교
신학교는 항상 분열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신학교가 신학이 소통되는 센터이기도 하거니와, 교계의 권력 판도가 신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학교를 통하여 후배 목회자를 양성하지 못하는 교단은 소멸할 것이고, 신학교를 통하여 배출되는 신학생에게 안수를 주기 위하여 교단이 필요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교단의 분열은 곧 신학교이 분열과 연결되고, 신학교가 분열되면 교단이 형성되곤 하였다. 한 교단에 신학교가 하나이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념이 지배적이었고, 1961년 박정희 혁명정부가 사회정화 차원에서 한 교단에 하나의 신학교만 있어야 한다는 정책을 공표한 것이 한 몫을 하기도 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명칭을 공통으로 사용하고 그 뒤에 신학교의 이름(예. 고신측)이나 신학교가 있는 지명(예. 청담동측)을 붙일 정도이다.

평양에 세워졌던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은 후 신학교들이 줄줄이 문을 열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남한의 장로교회에 최소한 4개의 신학교가 공존하고 있었다. 1939년 서울에 세워진 조선신학교, 1946년 신사참배 회개를 주장하는 정화운동 측이 세운 고려신학교, 1948년 박형룡이 서울에 세운 장로회신학교, 1948년 김치선이 세운 야간 신학교인 대한신학교 등이다. 1950년대가 되면서 이 신학교들은 각각의 교단을 갖게 될 것이다. 고신의 축출, 예장-기장 분열, 합동-통합 분열의 경우, 신학교 때문에 교단이 나누어진 것은 아니었다. 교단이 분열되면서 자연히 신학적 칼라가 다른 신학을 가진 신학교들이 그 교단의 신학교가 되었다.

하지만 1961년 설립된 대신측의 경우는 달랐다. 김치선이 세운 야간 사립 신학교인 대한신학교는 50년대 3대 분열을 거치면서 합동 측 야간신학교로 살아남아 있었다. 하지만 대한신학교를 졸업한 목사후보생들이 강도사 고시에서 낙방하는 사태가 빈번해 지고, 함경도 출신인 소수파 김치선도 대한신학교를 포기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김치선은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의 도움으로 신학교 건물을 매입하고 신학교를 정비하였다. 이는 곧 교단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유사한 경우가 1960년 고신과 승동측이 통합하여 ‘합동’ 측을 형성한 후, 3년 만에 ‘환원’된 사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신학교 문제였다. 처음 이 둘이 합동할 때부터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어떻게 할 것이냐가 교단 통합의 걸림돌이었다. 환원할 때에도 신학교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기말고사에서 총회신학교 학생들이 공공연히 부정행위하는 것에 고신 측 학생들이 놀란 것이다. 여기에 고신 측 출신 신학교 교수 임명이 거절 되는 사건 등이 겹친 것이다. 고신측도 1963년이 되면서 유능한 소장 학자들이 외국 유학에서 돌아옴으로 신학교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때였다.

1980년 합동측 신학교인 총회신학교에서 일어난 소위 ‘총신사태’로 인하여 박윤선을 포함한 5명의 교수들이 총신을 탈퇴하여 ‘합동신학교’를 세웠다. 존경 받는 노(老) 신학자였던 박윤선은 이 분열을 총신을 개혁하려는 것일 뿐, 새로운 교단을 형성할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곧 소박한 이상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신학교의 분리는 곧 교단의 성립으로 나타났다. 신학교가 세워진지 1년도 안 되어서, 1981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이 형성되었다.

한편 사립 신학교를 중심으로 분열을 거치지 않고 교단이 형성된 경우도 있다. 1952년 세워진 한국성서신학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한국성서선교총회, 1967년 미국 선교사 라보도에 의하여 세워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예장 웨신 측, 1976년에 세워진 ‘대한복음신학교’(후일 백석대학교)로부터 시작하여 1978년 형성된 예장 백석측 등이다.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 교권주의
선교초기부터 1950년대까지 한국교회에서 교권(敎權)이 존재하기는 하였지만, ‘교권주의’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 시대 교권의 중심은 선교사와 선교부의 달러였고, 지역을 따라 형성된 크고작은 패권들이 교권이 행사되는 통로였다. 분열에 재한 선교사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원래 외국 선교부 간의 다툼을 방지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시도된 선교지분할협정이 후일 교단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신학교를 비롯한 기관 운영을 선교사에 크게 의존하였던 당시 상황에서, 선교사들의 판단이나 입김이 교단의 결정들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이 3자(三自) 정책 가운데 ‘자치’를 일찍부터 원하기는 하였지만, 실상은 선교사가 교권을 쥐고 있었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1950년대의 분열에서 선교부는 큰 역할을 하였다. 고신측의 배후에는 ‘메첸파’로 불리던 ‘독립선교부’가, 기장측의 배후에는 캐나다연합교회의 선교부가, 통합측의 배후에는 미국장로교회 선교부가 있었다. 아무런 외부의 도움도 받지 못하던 합동 측은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의 자금을 받았다. 이러한 선교사의 교권과 더불어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권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선교사들의 숫자와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1961년 설립된 ‘성경장로교회’가 1968년 ‘국제기독교협의회’ 선교부와의 대립 끝에 대한예수교장로회(성장측, 후일 대신측)와 성경장로회로 분리된 이후 선교사가 한국교회의 분열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 산업화로 인하여 풍요한 사회로 진입하고, 또한 교세가 급격히 성장하면서, 세속화의 바람이 교회에도 불어 닥쳤다. ‘교권주의’라는 것이 이슈로 떠올랐다. 노회나 총회에서 얻은 권세를 행사하여 세속적 이익을 챙기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한 교회의 장로들을 사주하여 교회에 작은 분란을 일으키고, 노회에서 초헌법적인 ‘전권위원’들을 파송한다. 전권위원은 담임목사를 몰아내고 자파의 목사에게 그 교회를 넘겨주는 식이다. 신학교 차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한 지역의 세력을 등에 업은 정치력이 있는 목사가 학교의 이사로 들어와서 독재적으로 학교를 운영한다. 하수인들을 교회의 요직에 앉히고 학교를 사유화한다. 친한 사람들을 교수와 직원으로 채용하고 학생선발과 졸업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에 반발하는 사람이 합법적으로 대항하다가 결국 축출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때 그 축출되는 사람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되고 결국 교단 분열로 이어지곤 하였다. 1979년 합동 측 총신의 주류에 대항한 비주류는 이런 식으로 축출되었고, 십여 개의 교단으로 분열함으로 ‘합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교단을 낳았다.
불의한 세력이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의 순결과 연합을 무너뜨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치리회가 존재한다. 특히 장로교는 노회, 총회 등의 치리회가 매우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치리회를 무력화시키는데 한몫을 한 제도가 소위 무지역(無地域)노회라는 것이다. 이북 출신의 목회자들로 구성된 노회로서 통일이 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무지역노회 제도는 교권의 타락을 방조하는 요인으로 악용되었다. 지역노회에서 치리를 받은 목회자가 무지역노회에 가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지역노회는 소멸의 위험을 늘 안고 있어서 비교적 가입절차가 간소하기 때문이다. 무지역 노회를 허용한 장로교 교단들은 어느 교단이나 무지역노회의 소속 교회가 많고 그 세력이 큰 것은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심지어 해방 후 남한에서 자생한 교단들에도 무지역노회가 많다. 독자적으로 세력을 규합한 많은 노회들이 총회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는 예가 많다.

분열의 배경적 원인
분열이라는 것은 교회의 일이면서 또한 한국사회의 변동과 연동되어 일어나기 마련이다. 신사참배 이후 교회의 정화 문제나 사회참여에 관한 쟁점 등으로 인한 분열은 한국사회의 역사적 사건들과 직접 연관이 있는 것이다. 1950년대 분열에서 서로를 ‘용공’(容共) 혹은 ‘좌경’(左傾)이라고 비난하곤 하였었다. 이 또한 정치적인 파동이 교회를 얼마나 뒤흔들었는지를 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2013년 WCC 10차 총회 때 용공의 망령이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였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두고 볼 일이다.
사회의 변동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경우도 있다. 예컨대 해방 전 장로교단 내에서 분열의 조짐은 있었지만 실제로 분열이 일어난 것은 해방 이후이다. 해방 이후의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에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교리나 신조와 같은 정신적인 것보다는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속물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분열이 일어났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배경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해방 후부터 3,40년의 급격한 성장의 역사는 곧 분열의 역사이다. ‘천막만 치고 십자가만 걸어도 교회가 되는’ 시대였다. 교단이 핵분열을 거듭해도 교회의 숫자는 늘어나고 교세는 성장하였다. 파이가 커지니 먹을 사람이 많아져도 다 나눠먹을 수 있었다. 장로교단 250개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분열상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장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요즈음 교단들이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커진 것은 성장이 멈춘 우리 시대상을 반영한다. 교인의 숫자와 교회의 재정이 줄어들어 총회나 신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작은 교단의 미인가 군소 신학교에는 학생들이 오지 않기 때문에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음을 재빨리 알아차린 것이다.

분열의 배경적 원인으로서 한국교회의 분리주의적 성향도 한몫을 한다. 아무리 외적 여건이 성숙되어 있어도 교회의 분리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하였다면 쉽게 분열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 전수된 기독교는 소위 ‘교파교회’(denominationalism)이다. 처음부터 여러 교파가 한국에 들어왔기에 여러 교단들이 공존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의 모범을 많이 따랐는데 미국교회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분열하였다. 주로 신학적 자유주의로부터 교리적 거룩함을 지키고, 술•담배를 안 하고 주일을 성수하는 윤리적 순결을 지키려다가 분열이 일어나곤 하였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두 가지 속성, 즉 거룩함(purity)과 하나됨(unity) 가운데 전자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는 신앙과 두려움에서 비롯된 인간의 독선이 결합될 때 분리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분열은 쉽고 통합은 어렵다.
교단의 통합운동이 활발한 것은 늦었지만 환영할만한 일이다. 오랜 세월 나누어져서 발전하였던 교단이 굳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장로교 신학이 말하는 교회의 통일성은 보이는 교회의 제도적인 통일이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교회의 영적인 통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의 속성은 반드시 보이는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장로교 교회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느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왜 나누어진 채로 있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입증의 책임’(burden of proof)이 제도적인 통합을 반대하는 사람이 져야 한다는 말이다.

분열은 불가피한 이유들과 인간의 무지와 죄가 어우러져 나타나는 역사적 현상이다. 과거 불가피하였던 역사적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대화하고, 분열의 과정에서 슬쩍 끼어든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는 과정이 곧 통합의 과정이 될 것이다. 그 동안 누리던 각종 기득권과 자랑스러운 이름과 유서 깊은 역사를 포기하기도 해야 한다. 우리가 존경하던 선조들의 맨 얼굴을 만나게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의 살에 새겨져 있고 우리의 피를 흐르는 분리주의의 DNA를 역행해야 하기도 한다. 교단의 통합은 그리스도의 몸을 향한 사랑과 동시에 하늘의 지혜를 가진 자만이 수행할 수 있는 일이다. 분열은 쉽고 통합은 어렵다!